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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현수 Apr 16. 2022

성격이 다른 일을 동시에 할 때의 장점

[ 일인 브랜딩 회사가 일하는 법 ]

내가 미대 입시 디자인과를 준비하던 90년대에는 소묘와 평면구성이라는 두가지 실기 시험이 있었다. 소묘는 그리스 조각상을 놓고 연필로 드로잉을 했다. 자기 몸통만한 종이 위에 3~4시간 동안 완성해야하는  시험은 기본적인 형태와 입체에 대한 이해력, 관찰을 통한 묘사력 등의 능력을 보는   목적이었다. 기본적으로는 타고난 드로잉 재능이 어느 정도 필요했다.


평면 구성은 포스터 물감으로 점, 선, 면과 색을 통해 주어진 주제를 표현하는 시험이다. 대학가서 배우게 될 전공인 디자인과 굉장히 유사했다. 완벽한 형태력보다는 화면의 전반을 채울 줄 아는 구성력이 더 중요했다. 아이디어를 점, 선, 면의 기본 조형만으로 어떻게 적절하게 배치하고 조화롭게 구성하는지가 관건이었다.


소묘과 평면구성은 같은 그림이지만 이처럼 표현해야하는 대상과 느낌이 무척 달랐다. 그런 이유때문인지 소묘를 굉장히 잘하는데, 평면구성은 그만큼 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고, 그 반대의 경우도 많았던 것 같다. 마치 미술이라는 영역 안에서도 이과와 문과가 나뉜 듯한 느낌이랄까, 좌뇌와 우뇌를 따로 써서 그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소묘가 치밀하고 집요한 관찰력과 끈기가 필요한 순수 회화의 감성이었다면, 평면 구성은 자유롭게 발상하면서도 전체적인 조화롭게 구성하는 차갑고 이성적인 느낌을 가졌다.


성격이 달랐던 이 두가지 그림 훈련이 나중에 내가 디자인을 하는데 있어 얼마만큼의 도움을 줬는지는 잘 모르겠다. 전혀 도움이 안된 건 아니었지만 그걸 배우고 익히기 위해 쏟은 시간 대비 효과가 낮았던 건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두가지 대비되는 감각과 느낌을 익히면서 감각 전환 훈련과 교차되는 일들을 처리하는데 있어서는 분명 큰 도움이 됐다. 격차가 큰 감각에도 크게 당황하거나 스트레스를 받고 받아들일 수 있는 기본기다 만들어진 것 같다. 그런 점에서는 충분히 가치있는 경험이었다고 생각한다.


대학을 졸업하고 실무를 해야하는 디자인 회사에서는 소묘와 평면구성을 오가던 감각의 차이보다 훨씬 큰 격차로 감각을 겪어내야 했다. 예를들면 오늘은 화장품 프로젝트는 하다가 내일은 갑자기 건설사 관련 프로젝트를 해야했고, 그 다음날은 간장 패키지를 해야하는 상황이 될 때가 많았다. 그마저도 하루 단위가 아니라 오전 오후로 서로 전혀 다른 성격의 프로젝트를 나눠 진행해야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렇게 교차 하면서 하는 일이 처음에는 버겁고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이것도 점점 익숙해지자 좋은 점들도 있었다. 두개의 전혀 다른 감각의 프로젝트를 번갈아 가면서 하다보면 둘 사이에서 의외의 힌트를 얻기도 한다. 둘 사이를 오가는 틈 사이에서 막혔던 아이디어가 빠져 나오기도 했다. 물론 이도저도 아니고  더 꼬이고 혼란스러울 때도 많았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런 다른 성격이 교차하는 업무 방식은 하나의 프로젝트를 몇주간 몇개월간 물고 늘어지면서 바닥이 보일 때까지 파는 경우보다 더 결과가 좋았던 것 같다. 무조건 하나만 온전히 시간을 내서 한다고 반드시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것 아니었다. 오히려 전체가 잘 안보이고 가야할 방향도 흐릿해질 때도 생겼다.


1인 회사로 독립해서는 며칠동안 한가지의 프로젝트만 전념할 여유는 엄두도 못냈다. 하루에 두가지는 기본이고, 심지어 서너가지의 전혀 다른 성격의 프로젝트가 동시에 오갈 때가 많았다. 그런데 이런 교차 업무가 익숙해지고 습관이 되자 오히려 장점이 많았다. 좁았던 생각이 더 확장된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다른 프로젝트를 할 때는 건너편의 프로젝트를 객관적인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었다. 생산성이 더 올라가는 건 물론이고 서로의 프로젝트에 좋은 영향을 미치게 됐다.


완전히 다르지는 않더라고 비슷한 산업의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도 서로 도움이 된다. 예를 들어 전기 바이크를 관련 프로젝트를 진행하는데 마침 신재생 관련 브랜딩을 하고 있을 때도 있고, 천연 화장품 프로젝트를 하는데, 아로마 관련 브랜딩을 할 때가 그랬다.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맥락은 비슷하고 연계되는 지식들도 많았다. 두가지 사업에 대한 공부가 어느 정도 이뤄진 상태에서는 두가지 사업에 있어 분명 한두가지 정도의 연관성이 생기기 마련이다. 때문에 둘 사이의 정보와 아이디어가 융합되어 더 나은 생각을 얻을 수도 있었다.


이렇게 교차로 일하는 방식은 독서를 할 때도 도움을 됐다. 하나의 책을 다 읽을 때까지 잡고 있지 않고 서너권의 책을 놓고 교차해가면서 하는 독서는 일단 지루하지가 않았다. 다른 내용의 다채로운 생각들이 섞이면서 새로운 생각이 새로 생겨났다. 같은 분야의 다른 책도 마찬가지다. 관심있는 주제의 책을 여러권 읽으면 서로 관련될 때가 많다.  비슷한 분야의 책들에는 같은 말이나 개념을 다르게 설명하거나 말만 조금 바뀐 경우가 많았는데 그렇게 읽다보면 내용의 복습 효과가 있었다. 같은 걸 약간 다른 관점으로 보고 새롭게 해석하는 훈련이 되기도 한다.


사업도 마찬가지였다. 디자인과 브랜딩이라는 주제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면 그 안에서는 얼마든지 여러가지 시도를 해보는 편이다. 앞서 얘기했던 교차 업무와 교차 독서을 통해 얻은 긍적적인 경험때문이다. 이 게 나에게만 해당될지 아니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건 완벽한 집중보다는 조금은 다른 성격의 얇은 경험을 동시에 하는 게 전체의 성과와 생산성에 있어 좋은 결과를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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