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디자이너의 기획서 ]
디자이너가 혼자 독립해 회사 운영하다가 겪는 어려움 중에 가장 큰 하나가 바로 기획이 아닐까 싶다. 회사 있을 때는 기획자의 도움을 받을 수 있던 일을 혼자서 모든 기획을 다해내야 한다는 부담감은 상당하다.
그런 부담감을 이겨낼 틈도 없이 내 회사의 브랜드를 위한 기획, 디자인을 위한 기획, 내 사업의 미래를 위한 기획까지 어찌보면 회사에서 하는 일의 모든 일이 기획이라고 할 정도로 기획하는 일이 많아지고 비중이 올라간다는 걸 실감하게 된다. 그만큼 기획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회사에 소속되어 일할 때보다 훨씬 크게 느끼게 됐다.
디자인(Design)이라는 말 속에는 계획, 설계, 체계 등 명사로써 기획의 의미가 이미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독립 이전에는 디자이너로써 만들고, 표현하고, 구현하는 동사적인 의미에 충실했던 게 사실이다. 기획이라는 단어가 어떨 땐 디자인과는 상충될 때도, 굉장히 멀 게 느껴졌을 때도 있었다. 디자인을 진행하는 과정에서도 치밀한 기획을 떠올리기 보다는 최선의 표현을 생각하는데 더 많은 시간과 힘을 썼다.
혼자 독립해 기획까지 해야하는 디자이너가 되면서 부터는 변해야했다. 기획하지 않으면 어떤 일도 하지 못하게 되는 심각한 상황에 놓이게 되기 때문이다. 작게는 프로젝트 견적과 일정 제안하는 기획부터 크게는 한 브랜드의 전체 틀을 잡아야 하는 제안까지 이런 저런 성격의 다양한 기획을 구상하고 기획서를 만들어 설득 해야했다.
이렇게 모든 기획을 혼자서 다 해야하는 입장이 되면서 부터 과연 디자이너의 기획서는 다른 사람들과 어떻게 달아야할지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다. 원래 하던대로, 누구나 하는대로 하고 싶지는 않았다. 디자이너다운 기획을 하고 싶었다. 어느 정도 정해진 기획의 틀을 깨고 싶었다. 하지만 그게 그렇게만 생각한다고 풀릴 문제는 아니었다. 몇 년동안 다양한 브랜드들의 기획과 다양한 상황의 기획을 해보면서 내게 맞는 스타일의 기획과 내가 잘할 수 있는 기획 방법에 대해 자연스럽게 알게됐다.
그렇게 해서 결론은 디자이너다운 기획을 해야한다는 것이었다. 남들과는 다른 차별화된 기획을 하려면 디자이너라는 나의 본질을 살린 기획이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를 위한 구체적인 방법으로 '디자이너가 하는 기획은 영화의 시나리오를 쓰듯이 해야한다'는 개념을 잡았다. 디자이너의 기획은 PPT 장표 위에 건조하게 채워진 텍스트 뭉치가 아니라, 영화의 한장면이 그려지고 그 분위기와 감각이 느껴질 수 있는 기획이여야 한다. 이렇게 시나리오 작가가 되어 써 내려가는 기획서는 쓰는 입장에서도 그 걸 읽고 보는 입장에서도 몰입도 좋다.
그렇다면 기획의 시나리오는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시작은 내가 하고 싶은 어떤 '이야기'를 머리 속에 떠올려 보는 일부터다. 그런데 '이야기' 넣으려면 준비가 필요하다. 준비의 가장 기초는 우선 기획할 대상의 구체적인 실체를 온전하고 완벽하게 파악하는 것 부터다. 그냥 아는 정도가 아니라, 체화할 수 있을 정도로 깊이 아는 게 중요하다. 이 기초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면 떠오르는 이야기는 실체가 없는 공허한 이야기일 가능성이 크다.
이야기는 깊은 관심에서 나온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이야기도 마찬가지 아닌가. 둘 사이의 깊은 관심에서 이야기의 씨앗이 돋는다. 관심이 깊어지고 사랑이 시작되면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
가령 어떤 지역의 브랜딩 기획을 하게 되면 나는 인터넷에서 그 지역의 전체 지도 펼친다. 지역의 구석 구석을 며칠동안 돌아본다. 동서남북 어디에 건물이 있고 산이 있고 강이 있는지를 살핀다. 직접가서 보고 그 지역 전부를 돌아다니면 좋겠지만 시간적 여유가 없을 때는 구글 지도 속의 그 가상 공간을 마치 그 일대를 여행하듯 꼼꼼하게 돌아본다. 그러면서 이 공간, 이 지역 안에서 어떤 이야기들이 펼쳐질지를 상상해본다. 그 상상이 어떤 이야기로 연결될지에 대해 생각해본다. 이런 관심과 완벽한 파악 그리고 체화의 과정이 시나리오를 쓰는 기획의 첫 출발이다. 시나리오 작가들도 또한 마찬가기지 않을까 싶다.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 현장을 직접 방문하거나 역사적 무대가 됐던 그 공간의 자료들을 통독하거나 직접 그 주제와 관련된 사람들을 만나 인터뷰하는 노력들을 기울인다.
이렇게 관심을 가지고 주제를 들여다 보다보면 자연스럽게 그 프로젝트에 애정이 생기고 그러는 가운데 이야기의 실마리를 찾게 된다. 그렇게 나온 시간의 흐름이 느껴지는 스토리 안에 흥미로운 사건이 있는 콘텐츠까지 들어가면 전체 기획의 틀은 나왔다. 그 안의 세세한 아이디어를 채우기 위한 작은 기획들은 그 이후에 해나가면 된다.
어떤 이야기를 머리 속에 바로 그려보고 기획할 수 있는 건 디자이너가 하는 기획의 가장 큰 장점이다. 그렇게 이야기를 통해 실체화된 기획은 보는 사람 입장에서도 손에 잡힐듯 체감하게 된다. 그렇게 몸과 마음에 와 닿는 기획은 감동으로 연결되기 속도도 빠르다.
표현하는 것에만 익숙해 뭔가를 기획하는 일이 어려운 디자이너라면 기획서를 쓴다고 생각하지 말고 시나리오를 쓴다고 생각해보자. 디자이너들의 장점인 풍부한 시각 이미지를 머리 속에 떠올리며 기획해보자. 그 강점을 최대한 살려보자. 그러면 어떤 주제로 어떤 대상으로 기획을 하더라도 매력적이고 설득력 있는 기획을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