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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류작가 강은영 Aug 31. 2021

엄마라는 이름

"집에 자동차 있는 사람 손들어 보세요"

"TV, 냉장고 있는 사람 손들어 보세요"

80년대 말, 필자가 '국민학교'에 다니던 시절에는 학년 초가 되면 가정 조사와 가정 방문이라는 걸 했다. 부모님의 직업과 집안의 경제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서류로 조사하고 담임선생님이 집을 직접 방문해서 가정환경을 확인까지 하는 실로 놀라운 일들이 벌어졌다. 당시에 나는 가난한 살림살이와 부모님의 직업이 부끄러워 새 학년이 될 때마다 움츠러들곤 했다. 


아버지는 전국을 돌며 판소리로 연극을 하고 물건을 파는 극단의 배우였고 엄마는 관공서 식당에서 일을 했는데 어린 나는 이 직업을 도대체 뭐라고 해야 할지 수없이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부모님의 직업과 집안에 비싸고 좋은 물건이 어느 정도 있나 손을 들어 확인하는 시간에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조용히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가정 방문을 할 때면 허름한 집과 일하다 말고 집에 와서 쩔쩔매는 엄마를 선생님께 보여주는 게 끔찍이도 싫었다. 


어릴 적부터 자존심이 강했던 나는 선생님께 집안의 형편을 내보이는 것이 무척이나 괴로웠나 보다. 어린 마음에 내가 가진 조건과 환경이 나의 가치를 결정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보잘것없고 부끄럽게만 여겨졌기에 자존감이 낮을 수밖에 없었고 고학년이 될 때까지는 항상 조용하고 없는 아이처럼 지낼 수밖에 없었다.       



시골 학교지만 엄마들의 치맛바람이 어마어마한 곳이라 자모회라 불리던 학부모회 임원들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닌 듯 활개를 치고 다녔다. 아이들의 소풍, 운동회는 물론이고 학교의 모든 행사에 엄마들이 참여하고 선생님들의 식사를 책임졌으니 엄마가 학교에 자주 오는 집 아이는 선생님께 특별 대우를 받곤 했다. 그런 집은 대부분 잘 살기도 해서 그 아이들은 친구들 사이에서 선망의 대상으로 여겨지곤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놀라운 일이지만 학급의 임원을 담임 선생님이 지정해주기도 했는데 대부분은 자모회 아이들이었다. 그래서 경제적인 여유가 있고 아이의 교육에 열을 올리는 집에서는 엄마들이 앞다퉈 학교에 나타났던 것이다. 반면 남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혼자서 다섯 명의 자식을 키워야 했던 우리 엄마는 학교에 오는 일이 전무했다.


갑자기 비라도 내리는 날이면 현관 앞에 우두커니 서서, 우산을 들고 온 엄마와 함께 떠나는 아이들을 구경하다가 비를 맞으며 집으로 가야 했다. 즐거워야 마땅한 소풍과 운동회에도 엄마가 오지 않았기에 다른 집 돗자리 한구석에 자리 잡고 앉아 김밥을 꾸역꾸역 삼키고 엄마의 손길과 보살핌을 받는 아이들을 부럽게 바라보곤 했다.   

중, 고등학교에 가면서 자의식이 커지고 가정 조사를 하지 않는 등 상황은 나아졌지만 담임 선생님의 가정 방문과 비 오는 날의 곤란함은 나를 계속 따라다니며 괴롭혔다. 그러다 중학교 2학년이 된 어느 날, 갑자기 쏟아진 비에 망연자실해 있는데 웬일인지 엄마가 우산을 들고서 날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그때가 엄마가 우산을 들고 학교에 찾아와 준 유일무이한 날일 것이다. 


"엄마, 어떻게 온 거야?"
"일하다가 잠깐 시간 내서 왔지"
너무도 기분이 좋아서 빨간색 티셔츠와 흰 스커트를 예쁘게 입고 온 엄마를 꼭 껴안고 현관을 나서는데 국어 선생님이 인사를 하셨다.

"안녕하세요, 은영이 이모세요?"

"안녕하세요, 이모 아니고 엄마예요"
"우와 너무 젊고 예쁘셔서 이모인 줄 알았어요"


키가 키고 예쁘고 날씬한 엄마는 패션 감각마저 뛰어나서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였다. 나는 선생님의 그 말에 세상을 다 가진 듯 기분이 좋아졌다. 어릴 적부터 좋아했던 엄마 냄새를 맡으며 함께 우산을 쓰고 빗속을 걸어가던 그 순간의 느낌과 향기가 3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생생하다.   


이후로 엄마는 딱 두 번 더 학교에 왔는데 중학교, 고등학교 졸업식이었다. 공부를 곧잘 해서 대표로 단상에 나가 상을 받았기에 엄마에게 그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기억에는 없지만 나는 그때마다 엄마한테 꼭 예쁘게 하고 학교에 와야 한다고 당부했다고 한다. 한없이 움츠러들며 예쁘게 멋을 부린 다른 엄마들을 부럽게 바라만 봤던 국민학교 시절의 한을 그렇게라도 풀고 싶었나 보다.     



두 아이의 엄마가 된 지금, 예전의 엄마를 생각하면 절로 코끝이 매워지고 눈앞이 일렁인다. 엄마는 공부를 잘하고 나서기를 좋아하던 나에게 학급 임원은 하지 말라고 항상 당부했었다. 내가 임원이 되면 엄마가 자모회 임원이 되거나 하다 못해 학급 친구들에게 간식이라도 자주 돌려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존심이 강하고 승부욕과 성취욕이 큰 막내딸에게 학급 임원을 하지 말라고 했을 때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 잠시도 빠져나오기 힘든 군청 식당일을 하면서 학교에 갈 일이 생길 때마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요즘 학교에서는 예전에 하던 가정 조사는커녕 가정 방문조차 하지 않는다. 어느 순간 부모님의 직업을 쓰는 칸도 사라졌다. 당연하듯 계층을 나누고 그로 인한 차별이 이루어졌던 옛날과는 확연히 달라졌다. 소풍은 부모님이 참석을 안 하고 운동회도 참관만 한다. 그래서 아이가 입학하면 무조건 학부모회 임원을 하고 학교 행사에 모두 참석하겠다는 나의 포부는 아무 소용이 없게 되었다.


물론 요즘 시대에는 선생님들의 식사를 챙겨주는 것이 불법이고 치맛바람이 아이의 교육에 거의 영향을 주지 않는다. 아이를 낳으면 어린 시절 내가 겪었던 서러움은 절대 겪지 않게 하리라 다짐했는데 세상이 참 많이 변한 것이다. 엄마는 가진 게 없었기에 자식들에게 많은 걸 해주지 못한 걸 항상 안타까워하신다. 얼마 전에 병원 진료를 위해 오셨을 때도 병원 복도에서 느닷없이 다섯 형제를 참 힘들고 어렵게 키웠다며 울먹이셨다.


나는 조용히 듣다가 그런 생각하지 마시라고 그 이상 어떻게 더 열심히 살았겠느냐고 뻔한 위로를 건넸다. 밖으로만 돌며 처자식을 돌보지 않는 남편 때문에 오랜 세월 혼자서 자식들을 키워내야 했던 엄마. 남편복이 없는 엄마는 자식복마저 없어서 나를 제외한 4명의 자식이 모두 속을 썩이고 고생을 시켰다. 그런 엄마가 가엽고 바보같이 느껴져 아버지를 더 싫어하게 되었다. 어릴 적 내 꿈은 열심히 공부해서 성공하여 엄마를 호강시켜 드리는 거였는데 아직까지도 이루지 못한 꿈이다.


엄마, 너무도 가여운 우리 엄마!

우리가 함께 할 날이 많지 않음을 알기에 엄마를 떠올리고 부르기만 해도 눈물이 난다. 엄마를 호강시켜 드리지는 못해도 좋은 딸이 될 수는 있기에 오늘은 전화로 잔소리 대신 따뜻한 말을 건네봐야겠다.


엄마 보고 싶어요.  

그리고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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