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를 잘못 꿰맸는지 왼쪽 아래가 심하게 당기고 아파서 허리를 펴기가 힘들었다. 그런데 신생아 집중치료실(NICU)에는 휠체어를 타고 들어갈 수 없었다. 이름을 적고 소독을 한 후 허리를 90도쯤 굽히고 힘겹게 걸어가 유리창을 사이에 둔 채 처음으로 아이들을 마주했다.
1.54kg과 0.95kg
둘이 합쳐도 한 명의 몸무게에 못 미치는 작고 여린 생명들이 내 눈앞에 있었다. 이렇게 작은 아기를 본 적이 없어서 놀라웠고 너무도 일찍 태어나게 해서 미안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으로 예뻤다. 살면서 이토록 복잡한 감정에 사로잡힌 적이 있었던가. 유리창에 두 손을 올리고 예쁜 아이들을 바라보며 입가에는 미소를 띤 채 한참을 울었다. 아마도 죽기 전, 내 삶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질 때 가장 오래 머물 장면일 것이다.
2010년 당시에는 미숙아를 엄마가 안아볼 수 없던 시절이었다. 그다음 해 즈음 우리나라에도 '캥거루 케어'가 도입되어 매일 일정한 시간 동안 엄마와 접촉하고 아기에게 엄마의 심장소리를 들려줄 수 있었다.
그때 나도 아이들을 안아줄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두 아이 모두 건강하게 퇴원하고 자라는 기적이 일어났을 거라고 나는 확신한다. 갓 태어난 아기에게 엄마의 사랑만큼 강력하고 좋은 치료가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안타깝게도 당시에 나는 아이들을 마음대로 보지도 못하고 정해진 면회 시간에만 유리창 너머 인큐베이터 안에 있는 모습을 겨우 볼 수 있었다. 남편은 군인이었던 데다가 집과 병원은 한 시간 정도 떨어져 있어서 거의 주말에만 병원을 왔기에 매일 혼자 유리창 너머를 바라보며 훌쩍이다가 돌아오곤 했다.
두 아이를 두고 나 혼자 퇴원하는 날,
계속 병원에 있고 싶었지만 한 달 넘게 친정에 가 있는 큰 아이와 남편도 챙겨야 했기에 어쩔 수 없이 집으로 향했다. 예약해두었던 산후조리원과 산후 돌보미를 취소하고 제대로 몸조리도 하지 못한 채 매일 병원을 오갔다. 그렇게라도 아이들을 보아야 버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은 신생아 황달로 몸이 노랗다 못해 까매진 모습, 또 어느 날은 산소 호흡기를 착용한 모습에 오가는 길이 힘겨웠지만 하루하루 시간은 잘도 흘러갔다. 어딜 가서 무얼 먹으나 음식이 제대로 넘어가지 않았고 하다못해 숨조차 쉬이 드나들지 못했다. 편안하게 숨쉬기가 이렇게나 힘든 일인가! 애간장이 끊어지는 듯한 느낌이 바로 이런 것이리라. 생사를 오가는 핏덩이들을 지켜만 보는 일은 상상이상의 고통이었다.
그나마 좀 더 크게 태어난 둘째는 양호했는데 셋째는 상태가 점점 악화되어 갔다. 태어난 지 한 달 정도 됐을 때는 심장 수술도 했는데 몇 시간 수술을 받고 나니 온 몸에 살이 다 빠지고 뼈만 앙상하게 남아 있었다. 이후로도 소변을 보지 못해 몸이 붓기도 하고 위험한 순간을 몇 번이나 겪었는지 모른다. 그때마다 나는 온갖 신을 다 부르면서 제발 살아만 달라고, 내 곁에 있게만 해달라고 간절하게 기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