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치나 인테리어도 중요하지만 그곳에 머무는 사람들이 내는 에너지에 따라 장소의 느낌도 달라진다. 오랫동안 병원에 다닌 사람들은 특유의 긴장감과 무거운 에너지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 것이다. 특히 입원실이 있는 병동에 가면 환자와 보호자들의 고통, 슬픔, 불안, 무기력 등이 공기를 압도하는 느낌마저 든다.
우리 모자는 아이가 첫돌이 지날 무렵부터 지금까지 10년이 넘도록 수술과 재활치료를 위해 병원에 다니고 있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미국까지 가서 병원 생활을 했었다. 크고 작은 수술 경험만 열 번이 넘고 재활치료는 거의 매일 가고 있으니 가히 병원 VIP 고객이라 할 만하다.
병원이나 재활 치료실에 다니면 장애가 있는 아이, 엄마들과 마주친다. 나 역시도 한창 힘들 때 우울감과 무기력증에 시달린 적이 있는데 장애아 엄마들 중 상당수는 우울증을 겪고 있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지치는 것은 물론이고 치료비로 인한 경제적인 부담도 상당하다. 서로 모르는 사이지만 같은 처지라 잘 이해되면서 무겁고 깊은 에너지에 공명하기도 한다. 또한 재활치료가 끝나고 치료사들로부터 듣는 이야기는 대부분 부정적이다. 아이가 '이게 안된다. 부족하다. 이렇게 해야 한다.' 등 좋은 이야기보다 안 좋은 이야기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러다 보니 병원이나 치료실에 다녀오면 기가 빨리는 느낌마저 든다. 체력적으로 힘든 것은 물론이고 병원의 에너지, 치료사들의 부정적인 피드백으로 인해 아무리 긍정적인 생각을 하려고 해도 쉽지 않다. 긍정 마인드는커녕 우울증에 걸리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인 날들의 연속이었다. 그래서 나는 병원에 갈 때면 일부러 화사한 옷을 입고 적당히 꾸미고 간다. 하늘하늘한 원피스를 입거나 예쁜 귀걸이로 기분 전환을 하기도 한다. 자칫하면 부정적인 에너지에 동화되어 어두운 늪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의 이런 행동은 소아재활 치료실에서 특이한 사람으로 비쳐 뒷말을 듣기도 했다. 아이가 두 돌이 됐을 즈음 처음으로 입원 재활치료를 받았는데 매일 아침 입원해서 치료를 받고 오후에 퇴원하는 시스템이었다. 치료가 없거나 식사 시간에는 병실에서 엄마와 아이들이 다 같이 생활을 하는데 첫날부터 나를 유독 경계하는 게 느껴졌다. 나중에 친해지고 나서 알고 봤더니 입원하기 전부터 나는 '병원에서 패션쇼 하는 여자'로 엄마들 사이에서 유명했다고 한다.
아이 치료보다는 매일 화장하고 자기 꾸미는데만 신경을 쓴 걸로 보였을 테니 엄마들이 싫어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했다. 하지만 뿌리지도 않은 향수를 심하게 뿌리고 다녔다는 얘기를 듣고는 너무 황당해서 웃음만 나왔다. 당시에는 아이가 전부였기에 화장은 립스틱만 바르고 향수는 몇 년 동안 사용하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나처럼 여러 군데의 재활치료를 다니고 집에서도 매일 아이 치료를 해주는 엄마는 거의 보지 못했다. 이렇게 아이 치료에 열심인 사람도 드문데 이상한 오해를 받으니 억울하기까지 했다. 사람들의 편견과 고정관념이 그렇게 무서운 거다. 무겁고 부정적인 에너지를 이겨내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한 건데 눈에 보이는 대로, 자기 멋대로 사람을 판단하고 평가한다.
병원에 한 번이라도 갔다 오면 얼마나 지치는지 경험해 본 사람은 알 것이다. 그런 곳을 매일, 수년 동안 다닌다고 상상을 해보자. 웬만한 멘털로는 멀쩡하게 버티는 것조차 힘이 든다. 그렇기에 나는 남들이 패션쇼를 한다고 손가락질을 하건 말건 매일 소풍 가는 기분으로 꾸미고 간다. 오늘은 비가 오니까 핑크색 시폰 스커트에 청자켓을 입고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