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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류작가 강은영 Jul 03. 2021

무대 체질

"어머니, 오늘 강당에서 동시 발표대회를 했는데 윤성이가 하나도 떨지 않고 큰 소리로 또박또박 너무 잘하더라고요. 무대 체질인 것 같아요."


다섯 살에 걷기 시작한 아이는 여섯 살이 되어서야 유치원 특수반에 입학했다. 일곱 살을 앞둔 어느 날, 하원 하기 위해 유치원에 갔는데 선생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다. 강당이 꽤나 커서 무대에 올라가 발표하기 쉽지 않았을 텐데 잘했다고 하니 내심 놀라웠다.   


누구에게나 잘하는 것 한 가지 정도는 있기 마련이다. 만약 그게 없더라도 좋아하는 것 한 가지는 있을 것이다. 좋아하는 것을 열심히 하면 잘하게 되고 이는 자신만의 강점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장애아를 키울 때도 이 '한 가지'에 집중해야 한다. 모든 면에서 뒤처지고 부족한 아이라도 잘하는 것이나 좋아하는 것은 있을 테니까.


둘째에게는 남다른 흥과 끼가 있다. 어릴 때부터 많은 사람들 앞에서 춤추고 노래하는 것을 전혀 쑥스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즐길 정도로. 강원도 홍천의 시댁에는 노래방 기기가 있는데 명절날 20~30명의 어른들이 둘러싸고 앉아서 자기만 보는데도 신나게 흔들어대곤 했다.


아주 어릴 때는 멋 모르고 그럴 수 있는데 열두 살인 지금도 여전하다. 할머니 댁에 가면 혼자서 노래 부르다가도 사람들이 나타났을 때 갑자기 표정과 몸짓이 커지고 더 신나게 노래하면서 춤을 추곤 한다. 이 탁월한 쇼맨십은 유치원 발표회를 비롯하여 학교 공개수업과 학예회 때도 발휘되곤 했다. 긴장하거나 떠는 기색도 없이 매우 밝고 환한 표정으로 사람들 앞에 서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오직 자신만을 바라보는 무대 위에서는 긴장되게 마련이다. 나 역시 오랫동안 강의를 해왔지만 낯선 곳에 가거나 처음 본 사람들 앞에 서는 일은 여전히 긴장된다. 그나마 강의는 자신이 있지만 만약 노래를 부르거나 춤을 추거나 다른 걸 해야 한다면 며칠 전부터 잠을 설칠지도 모른다. 처음 연극을 하려고 무대에 섰을 때도 올라가기 직전까지 심장 뛰는 소리가 내 귓가에 들릴 정도였다.


나는 무대체질은 아니다. 진정으로 무대를 즐길 줄 아는 사람이 무대체질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속으로는 떨리는데 막상 무대에 서면 떨지 않고 잘해서 무대체질이라는 말을 종종 듣긴 했다. 하지만 무대 자체를 즐긴다기보다는 좋은 결과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완벽주의자라 그리 보일 뿐이다. 남에게 주목받는 건 좋아하지만 잘해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학창 시절부터 지금까지도 발표하거나 앞에 서는 일이 쉽지는 않다.


그런데 둘째는 결과가 전혀 상관없다는 듯이 그 순간을 즐긴다. 자신이 좋아하는 춤과 노래를 비롯하여 자신의 끼를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시간인 것이다. 어딜 가든 발표를 할 기회가 있으면 주저하지 않고 가장 먼저 손을 든다. 어디서 그런 용기와 자신감이 나오는지 작은 거인이라는 말이 참 어울리는 녀석이다.


공부할 때에는 좋아하는 노래를 틀어 놓으면 더 신나게 한다. 언뜻 보면 노래를 듣느라 집중을 못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음악 지능이 높은 아이에게는 도움이 된다. 음악 지능은 가드너의 다중 지능 중 하나인데 검사를 해보진 않았으나 아마도 음악 지능이 가장 높게 나올 것이다.    


공부는 어려워하는데 노래 가사는 한두 번 들으면 외우고 한 번 들은 노래도 흥얼거리며 따라 부른다. 그래서 구단을 외울 때도 노래로 외우기를 했다. 구구단의 원리를 이해하고 암기하는 일은 인지 능력이 떨어진 아이한테 너무도 버거운 일이다. 치료를 다니면 차에 있는 시간이 많은데 계속해서 구구단 송을 틀어놓고 같이 부르거나 돌아가면서 한 줄씩 부르는 식으로 했더니 2학년 수업 시간에 암기 테스트에서 1차로 바로 통과가 되었다. 따라서 무작정 공부를 시키거나 암기하는 것보다는 아이가 좋아하는 것을 잘 활용하는 것이 좋다.    

  


둘째의 가장 먼저 꾼 꿈과 가장 오래 지속된 꿈은 가수이다. 한창 그럴 나이라 어느 날은 축구 선수도 되고 싶어 했다가 어느 날은 유튜브 크리에이터가 되고 싶어 하지만 아이가 좋아하고 잘하는 것 한 가지와 장애가 있다는 점을 고려했을 때 가장 좋은 것은 소리꾼이 되는 것이다.


재작년에 돌아가신 필자의 아버지는 판소리 명창이셨다. 둘째가 여섯 살이던 어느 날,  아이가 자라면 판소리를 시켜 보라고 하셨다. 목소리가 철성(鐵聲:쇳소리)여서 소리꾼에게 좋은 소리를 가지고 태어났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저것 시켜보시더니 소질이 있다고 하셨다. 장애가 있어서 한(恨)을 담고 있는 판소리를 하기에 적합하다는 말씀과 함께.


나는 그 말씀을 잊지 않고 있다가 4학년 때부터 아이한테 판소리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소그룹 수업이었는데 역시나 발표할 때면 가장 먼저 손을 들어 소리를 하고는 했다. 지금은 코로나 시국이라 배움을 잠시 멈추고 있지만 지속할 생각이다. 무대 체질에 노래를 좋아하는 아이가 자신의 한을 판소리로 멋들어지게 공연할 날을 그려 본다. 나는 관객석 가장 앞자리 가운데에 앉아 환하게 빛나는 아들을 바라보고 있다.


아이가 부디 돌아가신 외할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았기를 간절히 바란다. 일평생 무대를 사랑하고 무대에 올랐던 아버지의 재능이 아이에게 유전되었을 거라고 믿는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것을 가장 잘하는 것으로 만들어 행복하게 살아갈 아이의 모습을 그려본다.


저는 <일류 두뇌>와 <당신의 뇌를 바꿔드립니다> 저자인 일류작가 강은영입니다.

세 번째 책으로 장애아인 둘째 양육 이야기를 쓰고 있어요.

올해 안에 발간하는 것이 목표인데 글이 잘 써지지 않아 편안하게 브런치에 초고를 연재하려고 합니다. 

초고니까 자주 수정이 될 것 같아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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