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아마추어
"엄마, 오늘 학교에서 연극을 봤는데 다 엄마들이래요.
엄청 잘하고 멋있던데 엄마도 하면 안 돼요?"
7년 전, 지금의 집으로 이사 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학교에서 돌아온 큰 아이가 말했다. 둘째가 유치원에 들어가기 전이었고 한창 재활치료에 집중할 때라 나중에 동생이 입학하면 하겠다고 약속을 했다. 그 후로도 아이는 연극 관람한 이야기를 했고 학년 초가 되면 학부모 연극 동아리 신청서가 날아왔으나 아이와의 약속은 기억에서 점점 희미해져 갔다.
3년이 흘러 둘째가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입학식 날 혼자서 아이를 데리고 교실로 갔는데 유난히 작은 아이가 휘청거리며 걸으니 시선이 단번에 집중되었다. 익히 받아온 시선이지만 불편하고 싫은 건 여전했기에 마음의 문을 안으로 꽁꽁 잠가 버리던 때였다. 겉으로는 줄곧 아닌 척 강한 척 당당한 모습을 유지했지만 비바람에 흔들리는 여린 나무처럼 마음속에서는 학교 생활에 대한 걱정, 불안이 두려움과 뒤엉켜 전쟁을 일으키고 있었다.
다음 날부터 등교를 하는데 정말이지 교실 창문에 딱 붙어서 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큰 아이 때는 느껴보지 못한 감정들로 혼란스러웠다. 발달이 최소 2~3년 정도 느린 아이라 대여섯 살 아이를 초등학교에 입학시킨 거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과연 제 나이에 학교를 보낸 것이 옳은 선택이었는지조차 불분명했다. 아이를 교실 앞까지 데려다주고 집으로 오는 길, 무거운 발걸음에 수십 번도 더 뒤를 돌아보던 날들이었다.
이후로 나는 학교에 갈 일이 생기면 무조건 갔다. 공개 수업은 물론이고 체육대회, 학예회 등이 교실에서 열렸는데 최대한 예쁘게 꾸미고 학교에 갔다. 혹여나 기가 죽어 있거나 힘들어할 아이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 엄마가 친구들에게 눈도장을 찍을수록 괴롭히거나 함부로 하는 친구들이 적어질 거란 생각이었다. 그래서 저학년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아책맘(아침에 책 읽어주는 엄마)'봉사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한 달에 두 번 정해진 교실에 들어가 동화책을 읽어주는데 우리 아이 반에는 자주 들어갈 수 있었다.
누구 엄마인지 소개하고 등장인물에 따라 목소리를 변조해가며 열연을 펼치곤 했다. 집에서 미리 책을 읽어보고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들려줄지 연구도 했다. 교실에 들어가면 "윤성이 엄마다!" 하는 아이들이 하나둘 생겨났고 무엇보다 교실에 앉아 있는 아이의 모습을 보는 것이 좋고 퍽 안심이 되었다. 아이 입장에서는 엄마가 선생님처럼 앞에서 책을 읽어주는 게 좋았나 보다.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 앞에서 강의를 해온 게 이럴 땐 도움이 된다. 누구 앞에서도 떨지 않는 강심장을 갖고 있으니 참 감사한 일이다.
그러던 어느 날, 완전히 잊고 있던 '신곡초 학부모 연극 동아리 콩세알' 신청서가 날아왔다. '아 맞다! 이게 있었지' 싶어 무릎을 탁 쳤다. 바로 신청서에 이름을 적고 지원 분야에는 주저 없이 '배우'로 체크를 했다. 배우를 해야 둘째와 친구들이 나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연극을 어떻게 하지? 무대 위에서 떨릴 텐데... 따위의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나에겐 못하는 건 배우면 되고 열심히 하면 잘하게 된다는 도전 정신과 자신감이 있다. 그리고 머지않아 나의 선택이 탁월했음이 증명되었다.
첫 공연은 1학년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내 귀는 짝짝이"라는 연극이었다. 신입 배우인 나는 비록 한 장면에만 등장했지만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선배 배우들의 오랜 경험과 열정적인 연습으로 공연 수준은 상상 이상으로 높았고 아이들의 집중하는 모습과 격렬한 반응에 그동안 힘들게 연습한 고충은 사라지고 희열과 보람이 느껴졌다. 연극을 마치고 학교 급식실에서 밥을 먹는데 아이들은 학부모 배우들을 마치 연예인 보듯이 쳐다봤는데 나는 그 모습이 더 신기하기만 했다.
그날 하교한 아이는 입학 이후 가장 행복한 표정으로 반 친구들이 연극 이야기, 엄마 이야기를 했다며 좋아했다. 1학년 엄마 중엔 내가 유일했으므로 친구들이 엄청 부러워했다면서 "우리 엄마 최고!"를 연발하며 어깨가 하늘로 치솟을 만큼 높이 솟은 모습이었다. 내가 원하던 게 바로 이거였다. 자신의 부족함을 잘 알고 있는 아이가 행여나 소심하게 학교 생활을 하지는 않을까 친구들에게 무시나 괴롭힘을 당하지는 않을까 전전긍긍하던 때였으니까.
나중에 알고보니 콩세알은 아책맘 활동을 하는 엄마들이 만든 동아리였다.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는데 그치지 말고 직접 공연을 보여주자는게 시작이었다고 한다. 나도 처음 시작은 내 아이를 위한 거였지만 점점 다른 아이들을 위하는 마음이 커졌다.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므로 연습하는 동안은 후회도 하고 다음에는 안하리라 매번 다짐하지만 막상 공연을 관람하는 아이들을 보면 다시 무대에 서곤 한다. 이후로 3년 동안 1년에 두 차례의 공연을 했는데 한번 할 때 6회 이상은 했으니 무대 경력도 꽤 쌓였다.
나는 아마추어지만 열정만은 가득한 연극배우이다. 큰 아들과의 약속으로 시작해 둘째를 위해 자처한 1년에 두 번 반짝 배우의 생활이 이제는 그립기만 하다. 안타깝게도 코로나 사태가 발생한 이후로 1년 반 넘도록 콩세알의 모든 활동이 정지 상태이다. 오로지 아이들을 위해 부모들의 순수한 열정으로 만들어낸 귀한 공연이 언제 다시 시작될지 미지수다. 아이가 5학년이 되면 그만 하기로 했는데 공연이 재개된다면 왠지 또다시 참여할 것 같다. 두 달간의 노력이 이틀이라는 공연 시간 동안 모두 보상을 받는 희한한 경험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언젠가 뮤지컬을 해보고 싶은 꿈도 있다. 연기와 노래와 춤, 이 세 가지는 내 심장을 뛰게 한다. 아이가 성인이 되면 그때 새로운 도전을 해도 좋을 것 같다. '장애아를 키우느라, 아이 때문에' 할 수 없던 많은 것들을 점차 하나씩 해나갈 것이다. 10년이 지나고 작가의 꿈을 이루어보니 늦은 때는 없고 할 수 없는 일이란 없다.
힘들었던 지난 시간들은 나만의 스토리가 되어 인생 무대에서 펼쳐지고 있다. 나는 여전히 아마추어 배우 같지만 언젠가 프로 배우가 되어 내 인생 무대와 관객을 휘어잡을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러기 위해서 나는 오늘도 하루의 주인공으로 최선을 다해 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