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열 살 차이가 나는 큰 언니가 있다. 언니는 일찍 결혼해서 아이를 낳았으니 내가 불과 초등학교 4학년 때 첫 조카가 생긴 셈이다. 동생 같은 조카에게 분유를 먹이고 업어주고 놀아주기도 했는데 어린 조카가 가장 좋아했던 장난감이 바로 오뚝이였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내가 좋아해서 자꾸 오뚝이를 가지고 놀아줬던 것 같다. 보라색 옷을 입은 공주 오뚝이였는데 아무리 넘어뜨려도 쓰러지지 않고 계속해서 웃는 얼굴로 일어나는 게 재미있고 신기했다. 아마도 11살 때 이미 내 안에는 오뚝이 정신이 자라고 있었나 보다.
결혼해서 둘째 아이를 낳기 전까지 내 인생은 순탄하게 잘 흘러갔다. 가정 형편과 환경이 좋지 않았지만 나름대로 개척하며 잘 살아왔다. 하지만 둘째를 낳고 나서는 인생 길이 방지턱의 연속과 같은 느낌이다. 겨우 하나를 넘으면 곧바로 또 다른, 더 크고 높은 방지턱이 나타난다. 그때마다 나는 넘어질지언정 쓰러지지 않고 다시 오뚝이처럼 일어나곤 했다.
뇌성마비 장애아를 키우면서 가장 힘들었던 점은 끝없이 재활치료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언제까지 하면 된다는 끝이 정해져 있다면 차라리 마음 편하게 할 수 있을 텐데 재활은 끝없이 어두운 터널 속을 걷는 것과 같다. 어쩌면 평생 빠져나가지 못할 수도 있는 터널 말이다.
첫 돌이 될 무렵까지 아이는 여전히 배밀이만 하고 네 발로 기어가지를 못했다. 발달이 수개월이나 느렸지만 대학병원의 소아과 의사는 뇌에 이상이 없으니 천천히 발달을 할 것이라고 했다. 나는 그 말을 철석같이 믿었다. 아니 믿고 싶었다. 매사에 의심이 많고 아니다 싶으면 철저하게 파고드는 내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첫 아이를 키워 보았기에 아이한테 이상이 있다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막내를 잃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남은 아이한테 문제가 있다는 게 밝혀질까 두려워 잠자코 기다렸다. 슬픈 예감이 틀리기만을 바라면서.
어느 날, 병원 정기 검진을 하는데 여태 괜찮다고 했던 의사가 뇌 MRI 촬영을 해보자고 했다. 충격으로 멍해진 나는 바보같이 "네? 왜요?"라고 대답했다. 이미 결과가 예상되었기 때문이다. 촬영을 하던 날, 당시 직업 군인이던 남편으로 인해 혼자서 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았다. 그리고 검사 결과를 듣던 날도 나는 혼자였다. 그때의 나는 왜 그리도 강했을까? 어쩌면 강해지고 싶어서 남편한테 함께 가자고 하지 않았던 것일까? 그깟 직업 군인이 뭐라고!
두렵고 무서운 마음을 누르고 아이를 안은 채 진료실에 앉아 결과를 들었다. MRI 사진의 검은 부분에 희끗희끗 해진 부분이 보였다. 그곳이 바로 뇌출혈로 손상이 된 부위라고 했다. 태어난 후 신생아 중환자실에 두 달 정도 있었는데 당시 퇴원할 때 실시한 검사에서는 없던 흔적이었다. 미미한 뇌출혈이 있었는데 흡수가 되어 괜찮다고 했었다. 분명 아무 문제없을 거라고 했는데...... 이 흔적은 평생 없어지지 않을 것이고 재활 치료를 하면 도움이 될 거라 했다. 백질 연화증. 생전 처음 듣는 단어를 기억하며 진료실을 빠져나왔다.
곧바로 남편한테 전화를 걸어 결과를 얘기하는데 참았던 눈물이 터지기 시작했다. 진료실 밖 의자에 앉아 좁은 목구멍으로 마구 터져 나오는 감당할 수 없는 슬픔들을 꾸역꾸역 삼켰다. 잔인한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하는 의사가 원망스러웠고 혼자서 이런 이야기를 듣게 한 남편이 미웠고 그동안 애써 진실을 외면해왔던 나 자신이 한심하고 바보 같아서 견딜 수가 없었다.
하지만 마음껏 슬퍼하고 괴로워할 겨를도 없이 나는 오뚝 일어서야만 했다. 집에서 가까운 대학병원에 가서 재활 치료를 위한 검사와 평가를 받고 치료 날짜를 잡았다. 당시만 해도 몰랐지만 그때부터 끝을 알 수 없는 길고 긴 재활 치료가 시작되었다.
아이들의 재활은 조기 발견, 조기 치료가 가장 중요하다. 이 두 가지를 놓친 나는 '조금 더 일찍 시작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에 정말 미친 듯이 치료를 다니기 시작했다. 병원뿐만 아니라 사설 치료센터, 복지관 등 갈 수 있는 모든 곳을 갔다. 아침에 밥을 먹고 도시락을 싸서 나오면 차에서 점심을 먹고 저녁이 되어서야 집에 돌아왔으니 당시 6살이던 첫째는 유치원이 끝나고 학원을 세 군데나 다녀야 했다. 하루에 3~4개는 기본이고 금요일에는 8번의 치료를 받은 적도 있다. 미안함과 죄책감, 실수 등을 만회하고 싶어서 모든 걸 다 쏟아부었던 것 같다. 심지어 토요일까지 치료를 다니고 일요일과 저녁에는 집에서도 운동을 시켰으니 잠시도 쉴 틈이 없었다.
돌이켜보면 쓰러지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고 버텼던 것 같다. 치료를 다니는 동안 하루에도 수십 번씩 다 그만두고 싶을 만큼 몸과 마음이 힘들었다. 남편은 퇴근했다가 다시 부대로 출근하거나 회식이 잦았기에 밤마다 애들을 재워 놓고 홀로 술잔을 기울였다. 그렇게 종일 참았던 슬픔과 고통을 홀로 쏟아내고 남편이 오기 전에 잠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이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전투적으로 치료를 다녔다. 밤에 잠시 넘어졌다가 아침이면 다시 일어나는 오뚝이였다.
그렇게 10년을 보내고 나자 '이제 나도 할 만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치료는 물론이고 각종 임상 시험, 미국에서의 수술까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 기울이고 나니 백질 연화증은 완치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만약 중간에 힘들다고 내 욕심대로 하고 싶은 일과 공부를 하고 아이를 남한테 맡겼다면 아마 평생 후회했을 것 같다. 아이한테 가장 중요한 10년을 오로지 아이를 위해 보냈으니 나는 스스로도 떳떳하고 자랑스럽게 얘기할 수 있다. 그리고 이제는 그토록 하고 싶던 일을 하고 작가가 되어 글을 쓰고 있으니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말이 10년이지 지옥과 같은 생활을 그리 오래 멀쩡하게 버틸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오뚝이도 계속 넘어뜨리면 고장이 나서 일어서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 긴 세월 동안 쓰러지지 않고 버틴 나, 오뚝이에게 이 자리를 빌려 감사와 감탄을 보낸다.
"나 정말 대단하고 수고 많았어. 그리고 잘 버텨줘서 정말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