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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브릴리 Sep 22. 2024

등유 한 말


북극으로 떠내려가는 방에서

모자가 빈 등유통 하나 들고 나옵니다

깊은 바닷속 같은 밤길을 나섭니다


엄마 말이라면 껌뻑 죽는 꼬맹이 아들을 데리고 북극의 오로라처럼 아른거리는 차가운 남편얼굴 같은 것을 날숨에 녹여 보내며 앞으로 걸어갑니다


꼬맹이 아들과 손을 꼭 붙잡고 한겨울밤 아스팔트 옆 차도를 따라 걷습니다 들개처럼 달려드는 차들의 전조등에 모자의 뒷모습이 위태롭게 깜박

입니다


엄마 너무 추워요 주유소까지 아직 멀었어요?

조금만 더 가면 돼 금방이야 금방

얼굴 손발 가슴 등과 엉덩이에 찬바람이 가느다란 수십 마리 뱀처럼 파고들어 기어 다닙니다


차가운 손을 비벼 꼬맹이 아들의 얼굴을 만져주는 엄마 덕분에 따뜻해질 방을 잠시 떠오릅니다

엄마의 양손이 금세 마른 흙처럼 틉니다

그래도 차들이 있어서 다행이에요

차들이 없었다면 앞이 잘 안보였을 테니까요


그런데 엄마 차들이 정말 많아요 끊임없이 와요 이 많은 차들은 어디서 달려오는 걸까요

어쩌면 혹시 먼 미래에서 달려오고 있는 건 아닐까요

앞으로만 달리다 보니 밤이 되면 바뀌는 공기의 흐름을 모르고 거꾸로 뒤집힌 파도처럼 역류하는 시간의 밤바람을 따라 자신도 모르게 과거로 되돌아오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저기 보세요 엄마 어른이 된 내가 보여요

운전석에 앉은 내가 차를 타고 달리고 있어요

어두운 밤 집에서 나와 거리를 한참 동안 헤매다가 남의 차를 타고 운전하고 다시 또 다른 차를 운전하는 내가 보여요

보세요 내가 운전하는 수백 대의 차들이 여기로 몰려오고 있어요

한겨울 추운 밤 외진 길을 혼자 걸으며 바라보는 별빛이 우리를 이끌어주고 같은 길 위를 걷게 하고 있어요


시린 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어두운 밤길 무거운 등유 한 말을 홀로 들고 돌아오는 것이 

어렵게 사온 등유 한통을 보일러에 모두 붓고 겨우 하룻밤을 버텨내는 여정이 생이라는 것을 엄마는 이미 알고 있었지요?


저기 멀리 차에서 내린 내가 가득 찬 석유 말통 하나를 들고 걸어오고 있어요

이면 충분할 것 같아요 오늘밤은

엄마 보세요 우리가 웃으며 같이 들고 가는 이 하얀 등유 말통 안이

불붙은 것처럼 점점 밝아지고 있어요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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