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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브릴리 Sep 28. 2024

기침소녀


프롤로그.

간신히 지상에 턱을 괸

얼굴만 한 창문과 시커먼 환풍기

청계천의 지하 봉제공장

기관총 쏘듯 돌아가는 미싱들 사이

잰걸음 바쁜 어린 시다들 틈

비쩍 마른 한 소녀가

좁은 꽃병에 담겨 계속 기침을 한다

그저 감기겠지 하고 참고

다시 일하고 밥을 먹고

물 먹고 숨을 쉬는 순간마다

집벌레 다리들처럼 자잘한 먼지들이

군데군데 덕지덕지 들러붙는다

기침은 한 달이 지나도록 멈추지 않고

폐결핵이 된 먼지는 그때부터

마른 꽃잎을 오래도록 은밀하게

갉아먹기 시작한다


1.

소녀는 매일 빼먹지 않고

한 번에 한주먹씩 하루 세 번

수두룩한 약을 먹어야 하고

엉덩이가 시퍼렇게 멍들도록

매일 주삿바늘에 찔려대도

대충 문지르고 병원을 나와

잠시 누워 쉬지도 못하고 일하러 가서

검은 먼지들을 또다시 뒤집어쓴다


2.

폐결핵이 처음 나았을 무렵

엄마가 된 소녀는

아기에게 옮길까 불안해

모유수유 한 번 못해보고

분유든 우유든 잘 못 먹고

자꾸만 토해내는 아기를 보며

눈치 없이 솟아나는 젖을

하루에도 몇 번씩 혼자 구석에서

양말 뭉치로 쓸쓸히 가슴을 문질러

하수구에 흘려버린다


3.

어린 아들을 집에 혼자 두고

밤늦게까지 공장에서 일하던 어느 날

또다시 기침이 멈추지 않고

소녀는 다시 병원으로 가고

전보다 더 많은 약을 먹고

전보다 더 많은 주사를 맞아

시꺼멓게 변해가는 엉덩이를 문지르고

외도하는 남편이 버린 집

차가운 방바닥 덥힐 돈을 벌기 위해

먼지 쌓인 공장으로 나간다


4.

오래 기생하던 폐결핵은

이제 완전히 떠나갔지만

구멍 뚫린 흉터는 그대로 남아

의심 많은 사춘기 아들은

기침이 조금만 길어지면

폐결핵을 의심하고

엄마에게 옮은 거라 탓하고

투병생활을 염려하는 말로

소녀의 흉터를 쿡쿡 찔러대고

소녀는 다시 죄인이 되고

남편은 나 몰라라 먹고 논다

집세와 먹을 것을 얻기 위해

소녀는 가쁜 숨을 쉬며

공공근로 하러 길거리에 나가

하수구 쓰레기들을 줍는다


5.

선분홍색 커다랗던 소녀의 폐는

문살만 남은 창호지 창(窓)처럼

이리저리 뜯겨나간 가슴을 손에 쥐고

가쁜 숨 몰아쉬며 기침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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