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벚꽃에만 눈길 건네야겠다
4살 때부터 살고 있는 집 앞에는 호밀밭 파수꾼 할아버지가 살았다. 언제부터인지 공공 토지에 멋대로 밭을 일구던 할아버지였다. 하지만 족히 1000년은 넘은 천하대장군 같은 표정 때문에, 아이들의 악몽으로 유명했다. 분명 어느 연약한 공무원 아저씨를 겁주어서 그 땅도 빼앗은 것이라고, 어린 나는 짐작했다. 가장 공포스러웠던 것은 밭일 때문에 노상 메고 있던 망태였다. 때문에 전래동화처럼 바람결에 애들을 잡아간다는 소문이 돌았으며, 한마디로 '망태 할아버지'로 통했다. 망태할아버지라는 별명에 보다 힘을 실어준 건, 민속화에 등장하는 호랑이 같은 표정이다. 누가 민속화 속 호랑이가 익살스럽고 까치에게 껌뻑 죽는다고 했던가, 난 그 작자를 흰 눈썹 망태 할아버지 앞에 끌고 가겠다고 마음먹곤 했다.
여전히 할아버지가 무서워서 그쪽 오솔길을 지날 때면 우선 창밖을 빼꼼히 내다보고 동태를 살폈다. 그때마다 할아버지는 아무도 겁주지 않고, 동화 속에 오류라도 걸린 듯 부지런했다. 봄이면 밭에 씨 뿌리고 여름에는 농약을 치며, 가을엔 수확. 그리고 겨울엔 검은 비닐로 땅에 이불을 덮어주는 세심함을 보였다. 난 험상궂은 땅에서 녹색의 여린 존재가 숨 쉬는 것도 신기했다. 왜냐면 여름방학 숙제로 고구마를 키웠는데, 내 착한 손길이 닿아도 탈모 환자의 이마처럼 휑했기 때문이다. 나는 처음으로 할아버지가 사실은 착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키가 껑충 자라나, 다 컸다고 착각하던 때부터 그 안쓰러워진 등에 시선이 머물렀다. 그렇게 밭에만 계시더니, 지렁이나 배추벌레가 할아버지 키마저 갉아먹은 게 아닌가 싶다. 그로부터 몇 년 후, 비가 많이 내리던 날밤 망태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러자 상심한 밭도 가진 눈물 모두 쏟아냈나 보다. 양수 없는 그곳에선 초록빛 태아 같은 새싹도 자라나지 않았다. 당연히 벌, 나비, 참새, 지렁이 따위도 있을 리 없다. 내 머릿속에서도 무서웠던 것이며, 안쓰러운 기억은 모두 과거에 머물렀다.
그 폐허에서는 관악기의
텅 빈 소리만이 서늘할 뿐이다
며칠 전 저녁, 폭격이라도 맞은 건지 그 집의 지붕이 폭싹 꺼졌다. 무슨 사정인진 모르지만, 굿판 벌이기 참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튿날 어머니께 여쭤보니 남은 가족들도 떠났고, 새로 이사 올 사람이 집을 새로 지을 것이란다. 깨진 치아 같은 창문이며 내려앉은 지붕은, 언젠가 안쓰럽던 망태 할아버지 그대로다. 집은 손써보기 전에 죽은 환자처럼, 단 며칠 만에 허물어졌다. 맛있는 것을 다 먹고 나서, 또는 어려운 시험을 치르고 장난처럼 배설했던 '인생무상'이란 말이 그런 건가 싶다. 누구네 개 짖는 소리와 아직은 쌀쌀한 밤바람만이 폐허에서 대금 연주 같은 텅 빈 소리가 들린다. 우리 집도, 부모님도,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도 관악기 소리처럼 그렇게 사라질 테지. 언젠가 모두 자유를 찾아 나만 남겨두고 떠날 텐데, 나 지금부터 무엇을 믿고, 어디에 마음 기울여야 하나 싶다.
오늘만은 벚꽃의
힘찬 울음에만 눈길 건네련다
오늘 아침햇살이 형체를 씻겨내도, 송장 같은 몸뚱어리는 것은 변함없다. 검은 시간 속으로 침몰하는 것을 도울 방법 없어, 하릴없이 비겁히 고개 돌려 외면했다. 조깅하기 위해 도착한 중랑천은 언젠가 내가 건널 강처럼 유독 검기만 하다. 언젠가를 위해 기억해야 하는 2016년 3월 27일 오늘, 한두 그루에 일찍 핀 벚꽃을 보았다. 나는 오늘 폐허 속 죽어가는 것들과 새로운 생명의 힘찬 울음 모두를 목도했다. 나도 언젠가 검은 물에 기꺼이 발 담그겠지만, 오늘은 벚꽃에만 눈길 건네야겠다. 오늘만은 내 글에 '녹아내린다, 먼지, 깜깜한, 시퍼런' 따위의 궁상맞은 표현을 쓰지 않겠다고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