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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밝음 Mar 30. 2016

런던의 새벽과 아침을 가로지르며

떠오른 심상을 쫓아서

파란 파스톤 가루를 곱게 문지른 듯한 런던의 아침
부드러운 파스텔빛의 런던 힐튼호텔



지평선으로 하얀 띠가 하루의 시작을 알리고 있지만,
나의 하루는 조금 망설이고 있다



첫 번째.


지평선으로 하얀 띠가 어둠을 밀어내고, 커피 포트는 새벽 수탉처럼 경쾌한 소리를 내는 새벽이다. 아늑한 TV는 어미를 기다리는 둥지 속 새끼처럼 조용히 지저귀고, 창 밖은 아득한 가운데 가로등만이 꾸벅꾸벅 졸고 있다. 커피가 내 심장을 시계 추처럼 흔들어 놓았는지, 설렘의 잔상이 잔잔하게 공기를 울린다. 이때 커피 잔 빙그레 돌고 있는 크림을 반으로 가르듯 쓰레기 수거 트럭 한 대가 어둠을 자른다. 트럭이 잠시 쉴 때마다 내는 거친 숨에는 중년 남성의 걸걸함과 고단함이 묻어있다.


나는 외출을 망설이며 괜스레 개켜진 옷의 보드라운 주름을 문질러본다. 시간이라는 선상에서 하루의 시작점은 우리와 다를 수 있으며, 언젠가 24시 패스트푸드점 노란 조명 아래에서 고단한 아침을 기다려본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혹시 탁자 위 고양이처럼 몸을 말고 있는 손목시계가 답을 줄 수 있을까 들여다보았으나, 터무니없이 4시 5분여를 가리키고 있다. 밤새 앓았던 몸살이 이 녀석에게 옮은 것일까 의심이 갔지만, 실은 현지 시간에 맞춰두지 않은 까닭이었다. 다시 말해 손목시계는 9시간 앞선 한국의 시간을 살고 있었다.


시간을 조정하지 않은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두고 온 사람들이나 내 온기가 홀로그램처럼 홀연히 등장하는 것을 바라보기 위해서이다. 그들이, 혹은 내 온기가 동그란 은반 위에서 지금 무얼 하고 있는지 알려줄 때면 이곳에서 나와 유일하게 연결된 끈처럼 느껴진다. 다른 하나는 9시간 차이에 불과하지만, 과거로의 시간여행을 경험해보고 싶다는 이유였다.


상상은 접어두고 정확한 시간을 위해 아이폰의 잠금을 해제하였다. 물리적인 시간은 일요일 오전 7시 5분여를 가리킨다. 이는 곧 런던의 아침이 시작되었다는 말로 바꾸어 쓸 수 있겠지만, 고여있는 마지막 커피 한 모금을 마시며 고요함이 입가에 번지는 아침을 기다려본다.



푸른색 파스텔 가루를 곱게 문지르는 듯
하늘은 점차 옅어지고 있다



두 번째.


문을 나섰다. 푸른색 파스텔 가루를 곱게 문지르는 듯 하늘은 점차 옅어지고 있지만, 여전히 고요라는 묵직함이 도로를 내리누르고 있다. 대답 없는 거리를 대신하여, 젖은 채 한켠에 가지런한 차량만이 지난밤에 있었던 사정을 추측하게끔 한다. 고요부터 자유로운 몸짓을 보이는 것은 미라의 손가락 마디 같은 나뭇가지뿐인데, 추위를 피해 파고드는 참새를 털어내기 위해 앙상한 몸을 바삐 흔들고 있다.


호텔에서 버스 두어 정거장 떨어진 노팅힐을 향한 발걸음이었지만, 또다시 놀이공원에 처음 온 아이처럼 스쳐 지나가는 모든 것들 마다 - 가래 끓는 소리를 내며 지나가는 빨간색 2층 버스, 반팔 반바지 차림으로 운동하는 금발의 남자, 마녀의 정원처럼 어둠이 깔린 하이드 파크, 부드러운 파스텔톤의 힐튼 호텔 - 눈길 주는 것을 잊지 않는다.


언급한 모든 것의 호기심을 해결하고 버스 정류장에 뿌듯하게 서 있는데 빨간색 2층 버스가 코너를 돌아 내쪽으로 향한다. 유독 빨간 버스는 나직한 거리와 대비되어, 그 색조와 명암까지 어느 아마추어가 합성해놓은 사진 같다. 문이 열리고 버스는 '가릉가릉'하는 엔진 소리를 내며 잠시 숨을 고르는데, 순간 이웃집 토토로의 고양이 버스의 얼굴을 본 것 같은 착각이 든다. 하지만 이내 '런던까지 올 리 없지'라고 생각하며 가벼운 발을 올렸다.


언젠가의 연보라색 양초가 떠오르는 노팅힐(Notting hill)근처
점차 황금빛 밀크티로 변하는 노팅힐(Notting hill) 아침



나의 경우엔 런던 하늘을 상상하면
연보라색 양초가 떠오른다



세 번째.


아무도 없는 2층 앞자리에서 거리를 내려다보는 것은 흥분 그 자체였다. '대관식'을 주제로 한 그림 속 왕은 왕관을 얹고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지만, 사실 나랑 같은 속내를 감추고 있진 않았을까. 나는 왕국이 평온한지 빛이 닿지 않는 거리까지 굽어보고 있다는 기분이었다. 그 황홀한 시간을 보내고 내린 곳의 하늘은 그새 화장을 마치고, 언제 어두운 민낯을 들켰냐는 듯 새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렇게 화장을 마친 런던 하늘은 연보라였는데, 하얀 양초와 보라색 크레파스를 냄비에 넣고 녹여낸 것 같았다. 그 두 가지 색은 섞이기를 거부하다가 이내 경계가 흐릿해지며 하나의 연보라색이 되어 뜨겁게 녹아내리고 있었다.


누군가는 영국의 색을 떠올리면 우중충한 잿빛과 빨간색이 떠오른다고 했지만, 나는 연보라색 양초가 떠오른다. 아마 오늘 아침은 런던 하늘에게 특별한 약속이 있어, 다른 붓터치를 했는가 보다 하고 상상하면서 말이다. 그 라벤더 향이 날 것만 같은 거리를 걸으며 그것이 점차 황금빛 밀크티로 변하는 것을 지켜보는 영광스러운 아침이다.


본 글은 2016년 1월의 여행기로, 발행일과는 시간과 계절 상의 차이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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