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살의 어느 아침, 나는 전깃줄처럼 뻗친 머리와 내복 바람으로 어기적 방에서 나왔다. 아침 만화영화를 보기 위함도, 새 나라의 어린이로 거듭나려는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단지 미군 부대원들의 아침 구보 함성 때문이었다. 아침부터 하얗거나 검은 사람들을 한 무더기나 보는 것은, 명절 오후의 특선 마술쇼만큼이나 진귀한 광경이었다. 어쩌면 군대에 여자가 있다는 것과, 그녀들이 '베르사유의 장미' 속 '오스칼'처럼 씩씩했기 때문에 더욱 놀라웠다. 나를 깨운 군가의 의미는 모르지만, 그들이 내지르는 뜨거운 입김과 달아오른 양 볼은 성애 낀 창문을 얼음장처럼 파랗게 질식시켰다.
일찍 일어나서 좋은 것은 200ml 딸기우유를 혼자 독차지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항상 배달된 흰 우유와 딸기우유를 두고 한 번씩 동생에게 양보해야 했지만, 탐탁지 않은 뻐꾸기 새끼의 심리였다. 어머니가 깰세라 우유함에서 딸기우유를 슬그머니 꺼내면, 토끼 마술에 성공한 마술사처럼 표정을 숨길 수 없었다. 그러나 어렵게 얻은 것에선 시린 입김 맛이 났다. 달콤함을 기대했건만, 내 목구멍을 따라 겨울의 계절만이 흘러내린 것이다. 그것은 동생에 대한 일말의 양심 탓도 아니고, 겨울은 단 것도 달지 않게 만든다는 것을 깨달았다.
핑크색 우유갑이 처음으로 파랗게 보인 날이었다.
영국의 하늘처럼 잿빛으로 변하는 11월이면 낮의 외출을 극도로 삼간다. 울먹이는 하늘을 최면에 걸린 듯 바라보면, 위로받지 못한 4살의 내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날은 끊임없이 들락거리는 발자국 때문에 잠에서 깼다. 일어나서 어머니를 찾았으나 집에 계시질 않았고, 내 눈높이에는 누구의 것인지 모를 다리만이 정처 없이 돌아다녔다. 다들 혼이 쏙 나간 사람들 같아서 아무도 나에게 시선조차 줄 여력이 없어 보였다. 흉흉하게 현관문이 열린 틈으로 잿빛의 푸석한 빛깔이 날아들었다. 정신 나간 친척들 틈에서 미아처럼 어머니를 찾아 나서자, 그제야 큰 외숙모가 나를 발견하곤 달래 준다.
큰 외숙모는 온기가 돌지 않는 휑한 집에서 나를 데리고 나왔다. 어디로 가느냐는 물음에 시외버스터미널로 간다고만 했다. 거기 2층엔 내가 좋아하는 햄버거 가게가 있어서 외숙모랑 몇 번 간 적이 있었다. 15분이면 도착할 거리지만, 오늘따라 외숙모의 발걸음이 왜 그토록 느린 건지 모르겠다. 게다가 하늘은 왜 울먹이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는지, 모든 '왜'라는 궁금증이 해결되지 않아 괜히 슬퍼진다. 결국 시외버스터미널 맞은편 횡단보도에서 울음이 터지고야 말았다. 난생처음 이유 없는 울음이었다. 눈물은 좋아하는 햄버거를 손에 쥐고도 그치질 않았고, 안에 든 머스터드 향이 이유 없이 나를 더 슬프게 만들었다.
며칠 후 나는 집에 누워있었다. 그 사이 끊어진 기억은 눈물에 번졌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깜깜한 방에 침실 스탠드가 어머니 얼굴만 노랗게 비추고 나머지는 우주처럼 영원히 깜깜하다.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지만, 아버지와의 나 사이의 끈이 끊어졌음을, 마치 탯줄이 끊어진 것처럼 아려왔다. 조심스레 아버지에 대해 물어보았는데, 아버지는 돈 벌러 가셨고 내가 어른이 되면 오실 거란다. 그러자 흰 수염 난 아버지가 천장에 그려졌다가, 노란 불빛 때문인지 삼베처럼 보이는걸 입곤 이내 사라진다. 그날 이후 11월의 울 것 같은 하늘을 차마 쳐다볼 수 없어, 그것이 울다 지쳐 잠든 후에야 슬며시 바깥 볼일을 본다. 4살의 내가 아직도 내 앞에 나타나는 것은, 어머니가 더 슬퍼질까 봐 그날 더 이상 캐묻지 않아서일 터이다. 위로가 필요했던 4살의 나는 여전히 시간 속에서 그 약속을 말없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리라. (이어지는 글)
2016년 1월의 겨울. 새벽의 타워 브리지 앞에서, 의미 있는 기억들이 한꺼번에 떠올랐다가 템스강에 의미 없이 쓸려 내려간다. 그냥 그런 아침이다.
본 글은 2016년 1월의 여행기로, 발행일과는 시간과 계절 상의 차이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