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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밝음 Apr 07. 2016

간절히 기다려본 적 있나요?

런던 트라팔가 광장(Trafalgar Square)에는 기다림이 있다

트라팔가 광장(Trafalgar Square)에서 멀리 보이는 빅벤


그녀와는 열아홉 살 때 같은 반이었다. 1년 동안 제대로 된 한 마디 나눠보지 못한 우리는, 애초에 데면데면할 것도 없는 사이였다. 그러나 나는 그녀를 짝사랑하며, 붉게 핀 열꽃처럼 시름시름 앓고 있었다. 가끔 출구 없는 복도에서 마주치기라도 하면, '강아지, 앵두, 닭꼬치' 같은 시시한 단어만 떠올랐다. 그것들을 멋대가리 없이 내뱉을 것만 같아, 늘 적당한 때를 기다리기만 했다. 그녀와는 언제나 할 말이 남은 사람들처럼 눈이 마주쳤지만, 그것도 별것 아니었다. 서로 다른 주파수는 서로에게 닿았다가 해독되지 못한 암호처럼 우주의 먼지가 되었다. 한 달에 한 번 짝을 바꾸는 날만 기다려 우주에 소원을 빌어보기도 했으나, 우주는 무심하기 짝이 없었다. 그랬던 열아홉의 그녀도, 열아홉의 나를 기다렸음을. 스무 살의 내가 한 친구로부터 문자 메시지를 받았다. 휴대폰의 LED 등이 꺼지면 내 꿈도 꺼질 것 같던 밤, 또다시 열꽃 핀 볼을 밝힌 채 메시지를 주기도문처럼 중얼거렸다. 교회당 채색 유리창 같은 액정 불빛 아래에서, 난 기꺼이 우주의 종이 되기로 했다.


트라팔가 광장(Trafalgar Square)의 어느 동상
트라팔가 광장(Trafalgar Square)의 거리 공연


스무 살의 3월 '신촌 민들레 영토'에서 기다렸던 그녀를 만났다. 이 시간이 지나면 그녀도 신기루처럼 사라질까 봐 불안했지만, 나를 두고 떠나지 않았다. 영원 같은 시간을 보내고 문을 나서자, 한 줄기 석양빛이 넓게 퍼지면서 도심의 호수 같은 창가마다 어려 있었다. 일곱 빛깔 중 주황색 한 줄기가 비스듬히 반사되어, 발밑을 주황빛으로 물들였고, 잔잔히 흘러가는 오후의 구름과 도로의 경계를 모호하게 했다. 우리는 주홍빛 미소에 취했는지, 아니면 몽실한 구름 때문인지 걷고 있다는 의식조차 모호해졌다. 우리는 더 이상 걷지 않았음에도, 석양이 길을 밝히고 구름이 우리를 품고 바래다주었다.


이후 그녀와는 세 번을 더 만났고, 세 번을 집 앞까지 바래다주었다. 그날 어두운 골목에서 두 귓불을 밝히며 편지 하나를 건넸다. 사귀자는 말을 종이비행기처럼 허공에 날리면, 그녀는 종이비행기처럼 떠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녀의 입술에서 '응'이라는 한 음절을 간절히 기대했으나, 하루 이틀 생각해보고 답변 주겠다고 했다. 서툴렀던 나는 당황했고, 그녀 또한 서툴러서 그랬던 것이었다.

내 삶을 통틀어 누군가를, 또 단 한 음절을 간절히 기다려본 적 있을까. 내가 건넨 편지에는 기다림의 시간과 어느 시 못지않은 영원한 퇴고의 과정이 담겨 있었다.


런던 내셔널 갤러리 앞에는, 그녀를 그려보려던 나의 고통과 헛된 기다림을 상기시키는 트라팔가 광장이 있다. 누군가는 손 안에 든 네모난 광장을 밝히며 메시지를 기다리고, 기다렸던 것을 받아 들곤 손에 꼬옥 쥔다. 행선지 모를 발걸음이 메시지처럼 광장에 쏟아지며 어느 멈춘 발 앞에 선다. 기다림과 만남이 있고, 여전히 홀로 서성 있는 발걸음이 있다. 막연한 기다림으로 변한 것들은, 누군가에게 닿지 못한 메시지처럼 우주의 먼지가 되고 만다.

광장을 무심히 떠나는 발걸음처럼 우리는 4년 후 광장에서 헤어졌다. 이제는 허물어진 신촌 민들레영토, 단 하루만 허락된 주황색 하늘, 그 밖의 추억이나 기억 따위만이 그 텅 빈 광장에서 먼지처럼 영원히 굴러다닌다.


글과 함께한 음악♪ (가수-음악)

* 심규선(Lucia) - 이제 슬픔은 우리를 어쩌지 못하리



* 하기는 그녀와 관련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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