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밝음 May 10. 2016

언어로 그린 '서울 정동길의 오후'

종로 정동공원부터 덕수궁 돌담길에 이르는 산책

노란 빗으로 곱게 빗겨진 정동공원
처연한 구(舊) 러시아 공사관


첫 번째.


 오후의 정동공원은 번잡한 도심의 풍경과 달리, 고립된 섬처럼 한적하기만 했다. 간혹 짝을 찾지 못한 새가 판소리 곡조를 뽑았지만, 이내 아스라이 멀어졌다. 태양은 노랗게 익어가고, 부스스했을 대지는 노란 빗으로 빗겨진 것처럼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뒤로는 콘크리트 숲이 울창했고, 투명한 엽록소를 활짝 편 채 광합성을 하고 있었다. 예원학교로 추정되는 곳에서 설익은 음표가 흘러나왔다. 피아노는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마처럼 거친 소리를 냈고, 조련사는 타악기처럼 건반을 때리거나 페달을 밟아 진정시켰다. 키가 큰 침엽수들은 듣도 못한 조악한 음표에 온몸의 털을 곤두세우곤, 까치발로 울타리 너머 교정을 들여다보았다.


 공원 뒤편 르네상스 시대를 기억하는 구(舊) 러시아 공사관 터로 발걸음을 옮겼다. 탑은 하얀색 칠이 군데군데 벗겨져 있었다. 흡사 흑백 기억을 자랑스럽게 나열하는 노인 같았고, 동시에 수심 어린 눈으로 도심을 굽어보는 처연함도 느껴졌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구(舊)라는 접두사가 붙는 순간, 유물처럼 시간의 한 토막에 갇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멧비둘기가 음지에서 '구구-'하고 우는 것은, 구슬픈 장송곡은 아닐까 라는. 나는 구한말, 구시대, 구시민회관 등 '구'로 시작하는 단어를 추도문처럼 읊조려 보았다.


이화 여자고등학교


두 번째.


 공원을 빠져나오면 예원학교와 이화여고 사이의 팽팽한 기류가 느껴진다. 마치 남자 교생 선생님을 두고 경쟁하는 여고생처럼. 전경 복무 시절, 그곳의 오전은 언제나 비가 내렸다. 비록 근무를 위해 습지 냄새가 밴 우의를 입어야 했지만, 그곳의 아침은 싱싱한 토양의 냄새로 설레었고, 언제나 첫 근무를 자청했다. 나직이 덮인 봄에 심취한 채, 사색을 즐기기 위함이었다. 동료들이 버스에서 자는 동안, 나는 이슬 머금은 달팽이처럼 느른한 발걸음을 굴리곤 했다. 두 개의 꼭짓점을 왕복할 때면, 머릿속 상념들은 늘어진 길을 따라 부표(浮漂) 했다. 그리곤 이완과 수축을 반복하며 내 발걸음과 같아지기 위해 보폭을 맞춰주었다. 간혹 빗방울은 굵어지며 팽팽한 도로 위에 손가락을 튕겨댔다. 그러곤 깨어나는 생명을 찬양하는 현악기 연주를 울렸다. 그러면 나는 허리춤에 찬 경찰봉을 발로 툭툭 차면서, 하늘의 장단에 박자를 맞춰주었다.


 오전 8시 무렵이면 개미굴처럼 좁은 도로에, 개미처럼 검은 차들이 늘어섰다. 문이 열리면 학생들이 개울물처럼 밀려왔고, 강처럼 물어름 지점에서 만나 들차고 요란한 소리를 냈다. 나는 개의치 않고 틈바구니를 비집고 걸어 다녔다. 흡사 회유하는 연어처럼 누군가의 등교 혹은 출근 시간을 역류했으며, 세상의 온갖 혼란과 환란으로부터 자유를 찾은 기분을 누렸다.


서울 시립미술관 입구의 봄
시립미술관 앞 원형 로터리


세 번째.


 기억의 편린을 옆구리에 낀 채, 정동극장 앞을 지났다. 소실점이 아득한 일직선 도로의 양옆에는 은행나무가 연둣빛 커튼을 드리웠고, 소슬한 바람결에 치렁거렸다. 나는 식어버린 아지랑이를 깊이 들이마시며, 온몸의 협곡마다 싱그러운 봄을 가득 채웠다. 공감각적으로, 또 물리적으로도 굽이굽이마다 출렁이는 생명을 느꼈다.


 시립미술관 앞 원형 로터리에 이르렀다. 욕조에 고인 물처럼 차들은 소용돌이를 그리며, 왼쪽으로 빙빙 돌았다. 도심의 모든 소음과 사사로운 번뇌가 빨려 들어가고 소멸하는 것처럼 보였다. 정동길이 유독 고요하고, 사람들의 발걸음마저 느려지는 것은 그 때문이 아닐까. 나 또한 같은 이유로 걷고 있으니 말이다. 마침 미술도구를 든 노인이 혼잡한 머릿속 질서를 잡으려는 듯, 로터리 둘레를 하염없이 돌았다. 나도 사념을 따돌리고, 그것이 뒤틀리길 바라며 한 바퀴를 따라 돌았다.


정동길의 끝자락, 덕수궁 돌담길


네 번째.


 어느덧 길의 끝자락이다. 도심 속 섬의 배수구에 당도한 것이다. 어스름한 저녁 빛도 한 꺼풀 얇게 내려앉았다. 어쩌면 봄이라는 생명의 몸속, 또는 본질을 따라 유랑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지나온 정동공원부터 서있는 덕수궁 돌담길까지 되돌아보았다. 그것은 몸속에 난 수로 같았다. 유려한 모퉁이와 곧게 뻗은 비탈길이, 나를 끌어당기거나 밀어낸 것이다. 정동길은 언급한 것들을 거듭하며, 필경 인파를 도심 속으로 배설했다.


 마지막 모서리를 막 돌았다. 그곳에는 중국어 학원과 한 평짜리 카페 간판이 즐비하게 널려있고, 수은이 든 불을 밝혔다. 온갖 풍문, 매캐한 도심의 구취, 치어들처럼 빼곡한 발자국, 그리고 고단함을 실어 나르는 버스가 고인 흙탕물처럼 한데 엉겨 있었다. 나는 그곳에 발을 내디뎠다. 갖은 상념이 부유하는, 도심의 저녁이 시작된 것이다.


* 사진정보: 정동길
* 사진 및 글의 무단 도용을 금합니다



* 하기와 본 글의 접점은 없지만, 관련 글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황금연휴와 우동 한 그릇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