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에 든 바다 위로
빗방울이 차락거리는 오전이다
흰나비가 구겨진 날개를 힘껏 펼쳐보지만, 실바람에 몸을 파르르 떤다. 아련한 다리로 애처롭게 매달려보지만 이내 떠밀리듯 날아오른다. 얼마간 아스라이 선회하다가, 상크름한 바람결에 아득해진다. 투명한 비늘에서 폴폴 떨어진 빗방울은, 손에 든 파란색 바다 위로 차락거린다. 굵기가 좀 더 성글어지자, 노랗거나 빨간 바다도 하늘을 가린 채 앞서 걸어간다.
나는 이름 모를 여린 나무에 몸을 구부리고, 농갈색의 밑동부터 담갈색의 가지까지 시선을 따라갔다. 마치 빛깔 자체에 심오한 삶이 담긴 듯, 꺼끌꺼끌한 주름의 깊이와 맨들맨들한 것까지 눈으로 어루 쓰다듬었다. 이번엔 시체처럼 풀이 죽은 갈색 더미를 디뎌보며 발에게도 즐거움을 주었다. 폭신한 것을 밟았더니 퀘퀘 묵은 눈더미의 검은 냄새가 솔솔 새어 나온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겨우내 풍뎅이나 지네 따위가 파고든 살림살이의 온기도 남아있다. 옆에는 성긴 틈새로 초록의 조밀한 머리가 비집고 나오는데, 감히 나에게 짓밟을 권리 없어 한 걸음 뒤로 발을 물렀다.
고요한 강은 숨 가쁘게
채워지다가 다시 사라진다
상념에 잠겨 걷다가, 시선 너머 고요한 중랑천을 입안 가득 머금어보았다. 우물처럼 동그랗게 벌려야 소리 나는 '랑'이라는 음절에는 태초의 양수가 바다처럼 넘실댄다. 입꼬리로 흘러나온 한 줄기는 텅 빈 악보처럼 고요히 흐르며, 힘찬 건반을 받아 적기 위해 숨을 죽인다. 마침내 다섯 물결 위로, 나비 비늘이 음표 되어 떨어지다가 촘촘한 망에 걸리고 만다. 크레셴도 빠르게, 도돌이표 한번 더. 덕분에 악보가 숨 가쁘게 채워진다.
이때 음흉한 다리 밑 흉측한 아가리가 흐름을 끊는다. 팔자걸음의 비릿한 녀석은 희번덕한 눈을 뜨곤, 게걸스럽게 생명을 삼킨다. 뱀처럼 간교스럽지만 동시에 뭉툭한 움직임으로 찰랑이는 그림자를 숭덩 썰고 지나가고, 남겨진 자리엔 물렁거리는 고깃덩이만 넘실거린다. 음습한 무리는 너울지는 물살을 따라 오리마저도 자리에서 밀어낸다. 떠나지 못한 겨울 손님은, 홀로 남겨진 셋방 설움에 초라하기만 하다. 다시 바라본 강은 지난겨울의 퀭하고 창백한 안색으로 변해있다.
고요한 가운데
변덕스럽고 아름다운 생명을 보았다
적당한 지점에서 다리를 건너 돌아 나오는데, 까치 한 마리와 참새 떼가 부대끼며 나뒹굴고 있다. 참새 녀석들이 보물 찾기라도 하는지 모래며 풀이며 들쑤시고 있고, 까치가 이를 못마땅하게 바라본다. 고약한 심보는 끝내 어린것들을 쫓아내고 모두를 독차지한다. 그리곤 두 차례 껄껄 웃어 보이더니 흥미를 잃었다는 듯 무심히 자리를 뜬다.
들판엔 분홍색 빗방울도 한 차례 내렸나 보다. 이른 벚나무는 비늘 같은 꽃잎을 후드득 털어내고, 최최한 옷만 걸친 채 호화스러운 과거의 편린들을 어렴풋이 떠올린다. 남루한 옷자루는 내일이면 빗자루에 쓸려갈 테고, 갈색 더미 옆 소도록하게 쌓여 함께 풀이 죽을 것이다. '일찍 핀 꽃은 그만큼 일찍 시드는 법'이라던 어느 노인의 애잔한 눈가가 떠오른다. 그아래 어린 개나리들은 벚나무의 허우룩한 마음 헤아릴 줄 모르는지, 그저 작달막하게 늘어서선 제비 새끼처럼 입만 찢어지게 벌리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산파 같은 꿀벌도 오늘은 비가 내려 쉬는 모양인지, 심통이 난 개나리의 노란 향기만이 공기 중에 진동한다.
봄비 내린 오늘은 모두에게 고요한 일요일이었다. 내게도 변덕스럽고도 아름다운 생명을 화폭에 담기 위해 찬찬히 몸을 움직이고, 그 과정에서 내 몸의 변덕스러운 것들까지 굽어볼 수 있던, 그런 날이었다. 덕분에 눈으로 쓸어서 보듬어보거나, 허리를 굽혀 무른 땅 숨의 고동까지 들어보았다. 번잡스러운 활자를 뇌리에서 지운 하루였기에, 내게는 아무도 슬피 울거나 강을 건너지 않은 하루로 기억될 것이다. 그러나 내일은 생명이 힘찬 울음을 준비하며 소란스러워질 터이다. 상념을 바람결에 뱉어내자 하얀 입김이 오전의 나비처럼 날아간다. 그리고 이내 희미해지지만, 오늘의 기억과 감각만은 오래 머물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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