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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윈서 Jan 17. 2021

매달 12일

가장 부유한 순간


매달 12일은 한 달 중에서 경제적으로 가장 행복한 날이다.  말일날 월급을 받으면 다음 달 1일부터 각종 공과금과 지난달 사용한 카드 청구서, 보험과 소소한 적금이 처리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은행이자가 빠져나가면  비로소 나는 통장의 주인이 된다.  물론 지난달 카드값에 따라 운신의 폭에 차이가 있지만 12일을 기점으로 빵, 커피, 군것질, 저렴한 액세서리, 소소한 화장품 등에 카드와 현금질을 하며 거리를 어슬렁 거릴 자유가 생기는 것이다.


오늘은 점심으로 편의점 김밥과 달걀, 그리고 음료를 사들고 탄천변 벤치로 향했다.  눈이 내리고 얼음이 얼어버린 겨울 날씨지만 코로나 때문에 어디 가서 편하게 음식을 먹는다는 건 호사가 되었다.  조금 춥더라도 살얼음이 언 탄천을 보면서 점심을 해결하는 것이 마음이 편하다.  다행히 눈이 소복이 앉은 나뭇가지는 봐도 봐도 질리지 않는 풍경이다.  이 나이에 눈 좋아한다고 동료들에게 핀잔을 듣기도 하지만 나는 눈을 좋아하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하다.


봄이 오면 노란 개나리가 활짝 피어날 마른 가지들 앞으로 학인지 두루미인지 고고한 새 한 마리가 먹이 사냥을 하는 중이다.  날씨가 짱짱하게 맑고 추운 날은 묘하게도 주위가 진공상태처럼 아득하게 느껴지면서 풍광들이 선명한 화질로 눈에 들어온다.  그래서인지 두루미의 몸은 눈 보다 하얗고 검은 턱선은 내가 입은 V넥 스웨터 같이 짙은 검정이다.  날개를 살짝 폈다가 접었을 뿐인데 햇빛에 반사된 깃털들이 눈 부시게 아름답다.



#무제


아름답던 것들은 여전히 아름답고

어둡다고 생각했던 것들도 그 속에 명암이 있으니

편견을 갖지 말 것


집에 돌아오는 길

촘촘히 박히는 발자국들은

빨리 가고 싶다는 내 성급함 보다

미끄러지지 말라고 내어준

땅이라는 이름 덕분이라고


알고 싶다고 알아지지도

듣고 싶다고 들려주지도 않는

인생의 열쇠는

어릴 적 할머니가 들려준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 속에

이미 있었던


다시 돌아가 보라고

다시 기억해 보라고

너는 이미 알고 있다고


그때 그 이야기가 왜 지금 들리는 걸까.



회사로 돌아갈 시간이다.  햇빛이 드는 양지쪽 길은 눈이 녹아 질척거릴 테니 일부러 사람들이 많이 다니지 않는 응달 길로 돌아갈 생각이다.  응달은 햇빛이 덜 비추는 곳이지 비추지 않는 곳이 아니니 걷기에 적당할 것이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모든 것에 이분법적이다.  0과 1사이 무수히 많은 점들을 무시하고 오직 그 두 숫자만 보는 것으로 많은 것을 참수하고 상처를 준다.  주었으면 또 받지 않았겠는가.


29일까지 하루하루 내 통장은 비어갈 것이다.  불어나고 늘어가는 것에 목적을 두고 움직이다 보면 작아지고 소박해지는 것이 낯설고 서럽기 마련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잔뜩 부풀어 오른 풍선의 한쪽을 누르면 어딘가 다른 쪽이 그만큼 더 커지게 된다.  그러니까 풍선 안의 공기 양은 구멍이 뚫리지 않는 이상 동일하다는 말이다.  월급 통장이 줄어든다는 건 나의 다른 쪽이 부풀어 오르고 있다는 뜻이겠지.  그러니 서러워하지 말고 가난해짐을 즐기자.  


이런저런 쓸데없는 잡생각을 하면서 걸었더니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했다.  <12일> 가장 부유한 날 몸도 마음도 놓아버릴 수 있어 좋았다.  다시 각 잡고 나는 시끄럽게 떠들며 동료들과 섞일 것이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은 내 점심메뉴가 소박하다고 생각하겠지만 편의점에서 가장 인기 있는 김밥이었고 가장 유명한 브랜드 계란이었다.  내 앞에 펼쳐진 설경은 충분히 고요했고 새의 날갯짓은 더없이 거룩했다.  


특별히 최고의 사색으로 이끈 최고의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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