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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윈서 Feb 15. 2021

소울푸드

- 잡  채 -


푸르른 날들이다.  본격적으로 따뜻해지고 노랑, 빨강 초록의 물결이 자연을 물들이면 굳이 애타지 않아도 희망의 새싹이 터져 나오는 모든 달들의 여왕 5월이다.


찌그러진 판자가 다닥다닥 겹쳐지고 이어진 골목을 돌아내려가면 축 처진 전기선이 여닫이 문틈으로 들어간 집이 보인다.  30대 초반 젊은 엄마가 오목한 밥그릇을 손에 쥐고는 머리를 빼꼼 내밀며 애타게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가끔 그릇을 얼굴에 가져가 냄새를 맡아보기도 하고 한가닥 입에 가져가 우물우물 씹어보기도 한다.  '올 때가 지났는데 얘는 왜 안 오는 거야'라고 생각하며 나타나기만 하면 잡아챌 준비를 하고 있는데 전기선이 연결된 앞집에는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는지 시끌벅적 사람들 소리가 요란하다.


초등학교 5학년 어린이는 여느 때처럼 학교가 끝나고 터벅터벅 비포장도로를 20분 넘게 걷고 있다.  먼지를 풀풀 내며 지나가는 차들도 피하고 또랑 옆으로 피어난 풀꽃들을 기웃거리기도 한다.  무엇보다 집에 가봐야 기다리는 사람도 없으니 삐뚤빼뚤 걸으며 하늘을 보다가 저 멀리 할머니 댁이 있는 쪽도 훑어보면서 신발주머니를 팔랑거리며 걷는다.  집들이 보이는 초입 경사로에는 가정집에서 문 밖으로 버린 물이 내려가는 배수구가 있는데 가끔 그 옆으로 팔딱팔딱 뛰는 개구리를 발견할 때도 있다.  그날도 배수구 옆에 쭈그리고 앉아 무슨 일이 생기지 않을까 물 소용돌이를 보며  시간을 보냈다.


가방을 집에 놓고 다시 나와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팔을 길게 늘어트린 채로 골목을 돌아서는데 눈 앞에 마법 같은 일이 일어났다.  나는 번개라도 맞은 사람처럼  멈춰 서서 똥그랗게 눈을 뜨고 앞을 쳐다보았다.  

'어? 꿈인가?'

"OO야 빨리 와 빨리"

"어? 엄마아?"

어리둥절 집 앞에 서니 엄마는 급한 마음에 내 팔을 집안으로 잡아끄신다.  그 바람에 높은 문턱에 발이 걸려 넘어질 뻔했지만 신경도 쓰지 않고 나를 바로 세우더니 다짜고짜 손에 들고 던 오목한 그릇을 코앞에 들이 미신다.  

"얼른 이거 먹어."

"이게 뭐야?"

엄마가 이 시간에 집에 어떻게 있는지 물어볼 겨를도 없이 나는 고소한 냄새에 이미 정신이 반쯤 나가버렸다.

"얼른 먹어, 너 줄려고 이거 들고 계속 기다리고 있었어 얼른 먹어 얼른."


그릇이 작아서 입이 큰 성인에게는 <딱 한 입>이면 사라질 양이었지만 꿈에서도 그리울 만큼 고소하고 기름진 맛이었다.  그야말로 혁명적이었다.

"이거 이름이 뭐야?" 두서너번 젓가락질을 했더니 어느새 바닥이 보여 엄마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잡채야.  앞집에 잔치가 있어서 만들었다고 한 그릇 줬어."

"또 줘, 조금만 더 달라고 해봐."

엄마는 금방 난처해진 표정을 지었다.  부끄러워서 남한테  아쉬운 소리를 못하는 성격인데 어린 딸이 조르는 탓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앞집을 살피기만 하셨다.  나는 다시 한번 엄마 치맛자락을 잡아당겼다.  

"알았어."




그 후 5색이 창연한 <그것>은 당연히 소울푸드가 되었다.  나에게 있어 잡채는 모든  위에 있는 음식이다.  아무리 맛있고 비싼 요리가 상에 펼쳐져 있어도 일단 잡채만 있으면 공략 대상 1호가 되었고, 점심 먹으러 들어간 식당에 반찬으로 나오면 몇 번이고 리필을 하는 탓에 정작 밥은 다 먹지 못했다.  재료가 골고루 들어간 잔치용이든 당면과 양파만 들어간 단출한 밑반찬용이든 가릴 것 없이 그 이름이 잡채라면 가리지 않다.  이제는 질릴 만도 한데 그만 밝혀야겠다 다짐을 하지만 정작 눈 앞에 보이기만 하면 식탁 앞으로 몸을 끌어당 하는 자성력 강한 음식인 것이다.  


언젠가 엄마한테 그날의 일이 기억나는지 여쭤보았다.  

"그랬어?"

"앞집 아줌마는 왜 그렇게 조금만 주셨을까?  이왕이면 한 그릇 채워주면 좋았을 텐데."

"없이 사는 집에 잡채를 많이 할 수 있었겠어? 그 집 식구도 많았잖아."

얻어먹는 처지에 양을 따지다니 나도 참 얄미운 사람이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모든 기억은 한 가지 요소로만 이루어져있지 않다.  따뜻한 날씨, 부재중일 거라 생각했던 엄마의 등장, 누군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기쁨, 그 고소하고 부드러운 잡채가락, 이 모든 것이 조화롭게 그날 그 순간을 이루었고 어느 것도 더하고 덜함 없이 훌륭한 합창이 되었기 때문이리라.  




이번 설 명절에 조카들이 인사를 왔다.  

집 밖으로 나가면 무한히 넓은 음식 스펙트럼 속에 살고 있는 그들이 할머니 음식에 환호한다.  

"할머니는 뭔가 할머니만의 코드가 있어요.  맛도 모양도 종류도 독특해서 딱히 <이것이다>하고 설명할 수는 없지만 가끔 생각나고 먹고 싶은 맛이에요."라고 말해준다.  옆에서 듣고 계시던 엄마를 힐끗보니 흐뭇해하신다.

조카들도 그들만의 추억을 할머니라는 대상을 통해 저장하고 있었구나.

그래서 가끔 할머니가 '언제 만두나 식혜를 만드시는지' 물어봤구나.  

'너희들도 나와 같은 향수를 갖게 되었구나.'  

그래, 우리는 가족이다.


사실 나는 음식 만드는 것이 재미없다.  과정도 뒤처리도 너무 복잡하고 불편해서 나 같은 사람은 맛있게 먹어주는 것으로 몫을 다하면 된다고 생각해 왔다.  물론 수없이 보아 온 음식이라 머릿속으로 재료와 순서 정도는 그릴 수 있지만 완성품으로 만들어 놓았을 때 결과가 어떨지 자신 없어서 시도조차 해보지 않았었다.

그래서 올해는 작은 목표를 세워보았다.  <나만의 잡채 레시피 만들기>이다.  

누군가 내 잡채를 그들의 <소울푸드>로 저장해 주지는 않겠지만 잘 만들어 보고 싶다.  나를 위해서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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