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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윈서 Jul 26. 2020

잘 하고 싶어요.

소통하기, 한국어 가르치기



"구글님에서 아프리카 사막여우 하고 소통할 수 있는 신기방기한 앱 개발  않을까?"


2019년 친구 권유로 평생교육원에 <외국어로서의 한국어 교육> 교과목을 신청했었다.   

석사도 아닌 학사만 몇 개냐, 게다가 <학문> 보다는  <정년 연장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하나씩 하다 보니

어느새 고만고만한 과정들을 거쳐 왔고 매번 마지막이라고 다짐했었다.

'이제 그만. 필요하면 좋은 글들 찾아서 읽고 유튜브 등에서 인사이트 넘치는 강의를 들으면서 취미생활이나 해보자고.'

다짐했지만 엉겁결에 신청 버튼을 <꾸욱> 누르고는 며칠을 후회했던거 같다.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도 아니었다. 어쩌다 보니 중간고사, 어쩌다 보니 기말고사 이런 과정들이 지나면 하나 둘씩

배지가 생겨났고 이번도 그랬다.  

좀 다르다면 내가 평소 관심 있던 "티칭"을 위한 과목이었고 한국어가 전 세계에 마구마구 전파되고 있으니 언젠가는 필요한 사람에게 무료봉사라도 하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아있는 언어는 어떤 걸까?


라떼는 영어가 두려워서 혼자 여행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여행 다녀온 얘기를 하면 빠짐없이 등장하는 질문이 있는데 "너, 영어 잘하나 봐?"였다. "못해도 다니는데 큰 지장 없어"라고 대답하지만 그들은 듣지 않았다.  

나는 어느새 프리토킹이 가능한 인재가 되어 눈에 보이지 않는 은근한 대접(?)을 받고 있었다.


"제2 외국어는 극복하기 어려운 난제인가."


개인적으로 '언어 공부'는 날씨예보 같다고 생각해왔다.  매번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는 패턴을 반복한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소위 '뉘앙스'라는 것이 있어서 두 사람 이상이 대화를 할 때, 청자와 화자의 비 언어적 태도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기도 한다.  모국어인 한국어도 그럴진대 제2 외국어인 영어는 굳이 설명이 필요하겠는가.  가끔 미드나 외화를 보고 있자면 아는 표현인데 자막이 다르거나 맥락을 이해하기 어려운 경우가 툭툭 튀어나온다.

그럴 때는 머릿속이 멍해지고 앞서 이해했던 내용까지 손가락 사이로 한꺼번에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고는 한다.  


그래서 영어 공부에 대한 생각을 바꾸어 보기로 했다.

더 이상 새로운 단어나 표현을 사전이나 표현집에서 찾아 헤매지 않고, 알고 있는 것들 만이라도 더 깊이 있게

이해해 보자는 것이다.  

이후, 지인들에게 혹은 영어공부를 할 기회가 생기면 이렇게 말한다.

"저는 알고 있는 단어나 표현을 원하는 장소와 상황 속에서 편안하게 사용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처음엔 이 말이 어색했는지 고개를 좌우로 흔들던 사람들도 곧 내 생각에 동의해 주었다.

컨퍼런스나 계약 같은 전문 지식이 필요한 분야에서 일하는 것도 아닌데 굳이 스트레스 받아가며 외워지지 않는 표현을 아침마다 반복할 필요가 있느냐 하는 내 주장이 받아들여진 것이다.  

(어쩌면 그들도 나와 같이 출구가 필요한 건 아니었을까? 하하)

어쨌든 나는 자유로워지기로 했다.  그리고 '소통'이라는 단어를 내 방식으로 합리화시키기로 했다.  

자기 결정이 중요하다고 알프레드 아들러가 주장하지 않았던가.



"그러면 어떻게?"


외국사람들과 영어로 얘기해야 하는 상황에서 나는 항상 웃는다. "당신이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해요"라고

말할 때도 웃고 있다. 설마 침을 뱉겠는가?  

다만 들을 때는 몸을 상대 쪽으로 약간 기울인 채로 귀를 쫑긋하고 눈썹을 올려 뜨거나 입에 힘을 주는 등

표정을 다양하게 한다.  어깨를 움츠리기도 하고 두 주먹을 불끈 쥐거나 펴보이기도 한다.  

내가 말을 할 때는 실수 연발이다.  부정사를 써야 할 동사에 동명사를 목적어로 쓰기도 하고 수동 표현은 익숙하지 않아서 두 손을 내 앞으로 끌어당기거나 몸을 비튼다든지 아무튼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이것은 수동이라고 적극적으로 알려준다. 생각나지 않는 단어를 다른 단어로 대체하는 것은 기본이다.  

그것도 안 되면 오만상을 찡그리면서 몇번이고 다시 설명한다.  

중요한 것은 상대방의 반응에 민감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상대방에 집중해야 한다는 뜻인데 어느 순간 상대가 고개를 끄덕인다 싶으면  "예스~" 하면서 약간 오버하는 몸짓과 함께 탄성을 지른다.  

'하하하, 우리는 각자 서로 다른 나라 출신이고 영어가 세계 공용어지만 나에게는 제2 외국어란 말이지.  

그러니 당신도 이해하라고.'

나는 이런 방법으로도 얼마든지 추상적인 대화가 가능하다고 주장하고 싶다.  




"<요가>란 무엇이냐면 말이야."


남인도 여행을 하고 있을 때였다.

스리랑카 도강을 꿈꾸던 내가 모슬렘 사원에서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인도 남자를 만났다.

사원 벽 쪽에 쭈그리고 앉아 따가운 해를 피하고 있던 내게 예외 없이 그가 옆에 와서 말을 걸었다.

"할로?"

'지루하고 반복적인 질문이 터지기 전에 내가 먼저 질문을 하자!'

"혹시 나마스와람에 가면 스리랑카로 가는 배를 탈 수 있을까?"

그 남자는 신이 나서 대답했다.  

간단한 정보 교환이 끝나고 그가 자기소개를 했는데, 자신은 요가 강사이고 지금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갑자기 "요가가 무엇이라고 생각해?"라고 기습 질문을 하는 것이 아닌가.

헛, 당황스러웠지만.. 티 나지 않게.. 생각하는 척.. 그의 눈을 한번 보고.. 하늘을 올려다 보고.. 몇 차례 반복..

하니까 그가 본인의 답을 내놓았다.


"너는 매일 밥을 먹잖아.  몸을 위해서, 건강한 삶을 위해서 밥을 먹잖아."

"그렇지, 밥을 먹으면 배고프지 않고 하루를 살 수 있어. 그렇게 하루를 살면 다음 날도 살 수 있고 죽을 때까지

그렇게 사는 거지."

"완벽해! 똑같은 이치야, 건강을 위해 밥을 먹듯이, 우리의 영혼을 위해 요가를 하는 거야.  그러니까 요가는

정신의 밥이야."

"Wow, Great!"

그는 영어로 교육을 받고 영어가 일상인 삶을 살고 있어서 유창한 발음과 표현을 사용했지만 나는 달랐다.

Food gives us our normal lives, next day and next day till we die.  

천천히 또박또박 next day를 계속 반복했고 till과 until를 번갈아 썼으며 심지어 이 문장이 얼마나 유치하고 조악한가.  그래도 우리는 대화가 충분했다.  나는 그의 설명에 감동했고 그는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는데 아무 지장이 없었다.  어떻게 아느냐고?  그의 표정이 그랬다.  

그리고 Wow, Great!이라고 외치는 내 표정에서 그는 완전한 소통을 짐작했을 테고 그런 대화는 십여분 더

지속되었다.

언어는 소통의 수단이지 그 자체로 목적이  되지 않는다. (언어학자가 아니라면 말이다.)






"한국어도 이렇게 가르치고 싶다"

여행은 삶이다?  뜨거운 물에 삶은 여행?

나보다 훌륭한 번역 앱들이 있지만, 따뜻한 인사를 나누고 다양한 표정이 있고 단어와 단어 사이,

문장과 문장 사이를 춤추듯 넘나들며 당신이 하는 말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할 준비가 되어 있다.

살아 있는 표정으로 나의 몸을 당신에게 기울인 채 말이다.

무엇보다 나는 버튼 하나를 누르면 다양한 맛이 쏟아지는 사탕 통처럼 다양한 색깔의 당신을 두 손으로

두 마음으로 받아 낼 자신이 있다.

이로써 우리는 대화에 만족할 수 있고 당신의 한국어가 성장할 것이다.  알프레도 아들러가 한 말을 기억해 달라.


이번 과정은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비록 아직 실력이 모자라고 경험도 절대적으로 부족하지만 내가 사랑하는 내 나라의 언어를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알려줄 수 있는 근간을 마련한 것 같아서 행복하다.



 - 매주 일요일 글을 올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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