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전! 홈스테이
#1
제니 방 앞에 서 있으면 문 틈으로 나온 냉기에 닭살이 돋았다. 처음에는 전기세 걱정을 하다가 금방 사람 걱정으로 바뀌었다. 저렇게 낮은 온도로 밤새 켜면 냉방병에 걸릴 수도 있다.
어느 날 아침 잠깐 문이 열렸길래 이름을 부르면서 방으로 들어가 리모컨을 확인해 보았다. 18도였다.
하루 종일 출입문을 열어두는 오프라인 매장도 그 정도는 아니다. 저러다 저체온증이라도 걸리면.....
"제니, 너무 춥지 않아? 이러다가 여름에 감기 걸리겠어."
"아니, 괜찮아요."
나는 이미 추워서 몸을 움츠리고 있었다.
제니가 학교에 간 후 에어컨 온도를 높이려고 방에 들어갔는데 아무리 눌러도 리모컨이 작동되지 않았다.
'아이코 이거구나, 추워도 온도를 높일 수가 없었어.' 너무 미안했다.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미국은 아이들이 온도를 맞추는 것에 익숙하지 않다고 한다. 한국에서야 날씨에 따라, 선풍기 여부에 따라 본인에게 맞는 온도로 맞추는 것이 일상이지만 대부분 설정되어 있는 온도로 살기 때문에 에어컨을 켜고 끄는 것도 익숙하지 않다고 한다. ON/OFF 도 그렇다면 온도 맞추는 것은 더욱이 생각을 못했을 수 있다. 게다가 한국어 리모컨에 작동도 되지 않았으니 눌러봤자 소용도 없고 내향적인 아이가 할 수 있는 일은 '참는 것뿐'이었을 것이다.
#2
제니는 학교 갔다 오면 반쯤 비워진 플라스틱 생수병에 정수기 물을 받아 방으로 들어간다. 한국에서는 편의점에서 생수를 사 마시는 일이 너무 자연스러운 행동이지만 그 플라스틱 병을 계속 사용하지는 않는다.
물론 나도 해외, 특히나 배낭여행을 가면 생수통을 들고 다니기는 했다.
'그렇다고 도심 속에서? 생각해 보니 저 물병을 며칠 동안 본 것 같은데 설마 같은 건 아니겠지.'
이런 생각을 하면서 가볍게 오늘 제니의 하루는 어땠냐고 물어보았다.
"학교 끝나고 그룹 미팅이 있었어요.
그런데 한국은 물을 마실 수 있는 곳이 없어요. 오직 학교와 집에서만 식수를 마실 수 있어요."
'아, 그래서 편의점에서 산 병에 학교와 집에서 물을 채워 가지고 다닌 거구나.'
"제가 살고 있는 곳에는 식수대가 많이 있어요."
다음날 나는 집에 있던 텀블러에 차가운 물을 가득 채워서 제니에게 건넸다.
"제니야 그 물 며칠 됐어? 몸에 좋지 않아. 이거 가지고 다니면서 시원한 물 마시는 게 좋겠어."
"아~ 감사합니다."
제니는 선뜻 텀블러를 받아 가방에 넣었다.
#3
오늘은 저녁 준비를 하기 어려울 것 같다. 밥을 너무 조금 먹어서 걱정을 하고 있던 차에 본인이 좋아하는 스파게티를 사주겠다고 밖으로 불러냈다. 어머니가 만든 음식이 입에 맞지 않은 건지 원래 조금 먹는지 확인해 볼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올림픽 공원 근처에 가성비 좋은 스파게티집이 있어서 우리는 그쪽으로 걸으면서 처음으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제니, 학교에서 한국어는 잘 배우고 있어?" 그러면서 초급 한국어 몇 마디를 했다. 사실 나는 모 구청에서 [외국인에게 한국어 가르치기] 자원봉사를 4년째 하고 있다. 필요하면 내가 가르쳐 주려고 슬쩍 말을 걸어 본 것이다.
그런데 제니는 자신이 한국어를 잘하지 못해 우리가 불편해한다고 생각했는지 조금 부담스러워하는 눈치였다. 제니의 한국어를 탓하는 게 아닌데 시무룩한 말투로 "이제 한국에 온 지 며칠 되지 않잖아요. 알파벳을 배우고 있고 이제 글자만 조금 읽을 수 있게 되었어요."
'아, 진짜 완전히 처음이구나.'
"제니야, 내가 한국어 공부를 도와줄 수 있어. 혹시 어렵거나 궁금한 내용이 있으면 언제든지 물어봐도 좋아. 도와줄게." 그렇게 말하고 그 주제에서 벗어났다.
"한국 여름은 덥고 습해서 학교 다니기 어렵지 않니?
"네, 정말 이렇게 더울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어요. 게다가 많이 걸어야 해서 조금 힘들어요."
제니는 16살부터 미국 집에서 운전을 했다고 한다. 대중교통이 없는 시골이다 보니 외출하려면 운전이 필수고 학교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한국은 운전을 할 필요는 없지만 많이 걸어야 돼요."
걷는 것이 일상이고 저녁이면 달리기를 하는 나에게는 아무렇지 않지만 제니는 지금 이 순간도 피곤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엊그제도 집에 돌아온 제니에게 어떻게 하루를 보냈냐고 물었더니 너무 피곤하다며 금방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었다. 깜짝 놀라서 알았다고 방에 들어가 쉬라고 말한 이후에는 아예 필요한 말 외에는 하지 않게 되었다.
각자 스파게티 하나씩 선택하고 같이 먹을 피자를 주문했다. 메인 메뉴 하나를 선택하면 식전 빵과 음료가 제공되는 곳이라 생각보다 식탁이 푸짐해졌다.
"제니,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해, 모르는 것도 불편한 것도 있으면 얘기해야 해."
"컴플레인하고 싶지 않아요."
"컴플레인이 아니야, 너의 의견을 말하는 거야. 그래야 우리가 서로 알아갈 수 있지."
"네~" 언제나 대답은 잘했다.
"나는 인도 여행을 다녀왔었어. 너희 부모님의 고향인 남인도에도 다녀왔지. 내가 알기로 남인도 어느 지역의 언어는 한국어와 아주 비슷하다고 하던데 알고 있어?"
"네, 미국 집에서 엄마에게 저도 엄마라고 불러요. 아빠는 아빠라고 부르고 오빠한테는 안나라고 불러요."
"그래? 와~ 왜 그렇게 비슷할까? 아주 먼 옛날에 인도와 한국이 교류했다고 하던데 그래서일까? 아무튼
재미있고 신기해."
"네 그런 거 같아요."
낯선 음식이 아니라서 그런지 제법 잘 먹었다. 어쩔 수 없이 짧은 영어를 계속해야 했지만 아이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시간이었다.
#4
38도를 오르내리는 더운 여름에 첫날부터 제니는 저녁에 샤워를 하지 않았다. 저녁 식사가 끝나면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는데 양치질은 해야 하니 나오겠지 싶었지만 내가 잠이 들 때까지 문은 열리지 않았다.
아침 5시 반에서 6시 사이에 화장실에 들어가 아주 긴 샤워를 하는 눈치였다. 제니가 나오고 화장실에 들어가면 더운 온기가 훅하고 달려들었다. 아침 샤워라도 하니 다행이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어머니와 나는 저녁에 씻지 않는 것에 대해 궁금해하며 이유를 생각해 보았다.
"에어컨 때문에 그럴까?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더운데 어떻게 샤워를 안 하지? 하루 종일 땀범벅이 되었을 텐데 말이야, 양치질은? 아침에 화장을 저렇게 짙게 하고 나가는데, 씻지 않아도 되는 비법이라도 있는 건가?"
오늘은 슬쩍 얘길 꺼내봐야겠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너무 더워서 끈적거린다고 일부러 과장되게 불평을 했다.
"아휴, 너~무 덥다. 제니야 네가 먼저 샤워해, 나는 네가 한 다음에 할게."
그랬더니 아주 작은 목소리로 '샤워? 저녁에 해도 되는구나.' 이러는 것이 아닌가.
마치 저녁에는 샤워하면 안 되는 줄 알고 있었다는 듯이 약간 신이 나서 혼잣말을 하는 모습을 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어린 나이에 낯선 나라에 와서 처음 보는 사람들과 함께 산다는 것이 얼마나 불편할까.
나는 마음이 아팠다.
"오케이, 그럼 금방 하고 나올게요." 수건을 들고 화장실로 사뿐히 들어갔다.
큰 키에 나비처럼 날듯이 걷는 제니의 뒷모습이 예쁘기만 했다.
#5
이번에는 빨래 이야기를 해야 했다.
제니가 화장실에서 나오기를 기다려 "제니야 너 빨래 언제 할 거야? 안 해도 되겠어?"라고 물어보았다.
"아, 빨래 진짜 해야 해요. 그런데 제가 속옷하고 분리해서 내놓을게요."
"오케이, 세탁실에 넣어두면 돼."
그다음 날도 빨래는 나오지 않았다.
또 뭔가 눈치를 보는 것 같아서 낮에 문자를 보냈다. "제니야, 빨래 언제 할래?"
"오늘은 꼭 해야 해요."
"그럼 내놔야 해 주지?"
"네~"
결국 분리를 끝냈는지 커다란 빨래망을 질질 끌면서 방에서 나왔다. 속옷은 스스로 하라는 첫날 메모 때문이었는지 겉옷만 잔뜩 있었다. 안 되겠다 싶어서 "속옷은?"라고 물었더니 "그건 제가 할게요."라며 방 한쪽 구석을 쳐다보는 게 아닌가. 아이고 모르겠다, 나는 다른 빨래망을 건네며 "여기 다 넣어."라고 말했다.
제니는 나비처럼 가벼운 몸짓으로 하얀 빨래망에 속옷을 잔뜩 집어넣었다.
엄마는 세탁기를 세 번이나 돌렸다고 하셨다. 집에 온 지 5일째, 한국에 온 지 7일째인 제니의 빨래는 여름옷임에도 불구하고 엄청나게 많았다. 매일 학교에서 돌아오면 벗고 아침에 일어나서 어젯밤에 입은 옷도 벗어두는 모양이었다. 결국 속옷까지 다 빨고 잘 개어서 제니 방에 넣어주었더니 마음까지 개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