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니 노래방을 가다

by 윈서


센터에서 안내한 학생들의 통금 시간은 주중 9시, 주말 10시였다. 우리 집 저녁 시간은 6시 30분에서 7시 30분으로 제니는 특별한 일이 없으면 5시 30분 정도면 집으로 돌아왔다. 물론 친구들과 저녁을 먹는다 해도 8시면 들어오기 때문에 그녀의 서울 생활에 대해 전혀 걱정하지 않았었다.


그날은 오후 5시쯤 수업 끝나고 친구들과 저녁 먹고 들어가겠다는 문자를 받았다. 나는 혹시 몰라 간단한 저녁 간식을 준비해 두고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웬일인지 8시가 넘어도 소식이 없었다.

"제니, 지금 오고 있니?"

전에 우리 집 근처에 친구가 살고 있다는 말을 들어서 그 친구랑 같이 있으려나 생각을 하고 답이 오기를 기다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인근 호스트 가족의 연락처를 알아둘걸 그랬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 홍대에 있어요. 혹시 10시까지 들어가도 될까요?" 문자를 보낸 지 1시간 정도 지난 후 연락이 왔다.

한 여름밤 10시, 그것도 서울에 살고 있는데 무엇이 문제겠는가. 도시는 여전히 젊게 빛나고 있는데 말이다.

"그럼, 재미있게 놀다 와. 돌아올 때는 꼭 문자 보내 줘야 해."


10시 넘었는데 연락이 오지 않아 걱정이 되었다.

"제니, 지금 오는 중이지?"

"네, 지하철인데 잠실에 내려서 버스를 타려고 해요. 0000번 버스를 탈거예요."

"그래, 알았어. 내가 집 앞 정거장에 나갈 거야, 걱정 말고 천천히 와."

지난번 제대로 내리지 못해 강남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왔던 일을 생각하면서 나는 버스 정거장으로 나갔다.

0000번 버스가 내 앞에 서고 지나가기를 몇 번, 그러나 기다리는 아이는 버스에서 내리지 않았다.

그렇게 몇 분이 더 지나고 멀리 사거리 앞쪽에서 신호대기를 하는 버스가 보였다. LED 등으로 유난히 밝은 버스 안에서 긴 곱슬머리에 헤드셋을 한 제니의 실루엣이 보였다.

'왔구나.' 나는 엉거주춤 벤치에서 일어날 준비를 했다. 그런데 그 버스가 내 앞에 서려고 속도를 늦추는가 싶더니 그대로 떠나는 게 아닌가. 나는 깜짝 놀라서 떠나는 버스를 향해 뛰었다.

"제니, 제니야 내려야 해."

내 목소리를 들었는지 아니면 버스가 서지 않은 것에 놀랐는지 제니가 걱정스럽게 뒷 문 앞에 서더니 기사님 쪽을 바라보았다. 벨을 눌러야 하는데 누르지 않은 모양이었다.

내가 서있는 정거장을 지나 횡단보도에서 버스 기사님은 노란불을 놓치지 않으려고 액셀을 밟는 것 같았다. 갑작스러운 속도 때문이었는지 차가 앞으로 약간 쏠렸다.

맙소사, 나는 더 빨라지고 목소리는 커졌다.

"제니, 내려야 해, 세워주세요."

제니도 나를 발견했는지 어쩔 줄 몰라했고 급기야 버스에 탄 승객들도 창밖을 보다가 상황을 눈치챈 것 같았다. 한 정거장 차이 그것도 동네에서 아파트 단지 범위 안에 있는 정거장이건만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나는 당황하고 호흡이 빨라졌다.

다행히 기사님은 외국인이 엉거주춤 서 있는 모습에 혼내지 않고 버스를 세워 문을 열어 주셨다.

"정말 죄송해요, 너무 늦게 와서 기다리게 했어요."

"낮에는 저 버스가 모든 정거장에 서요. 그래서 지금도 그럴 줄 알고 벨을 누르지 않았는데 밤이라서 내릴 사람이 없어서인지 버스가 그냥 지나갔어요." 본인도 놀란 눈치였다.

나는 잠시 진정하고 밝게 웃으며 걱정하는 제니를 안심시켰다.

"괜찮아, 괜찮아."

"친구들하고 홍대 노래방을 갔어요. 길거리에서 공연하는 사람들도 많고 너무 재미있어서 시간이 금방 지나갔는데 나는 집에서 이렇게 먼 곳인지 몰랐어요, 죄송해요."

"그래? 홍대 거리에 가서 즐기고 노래방도 갔어? 재밌었겠다, 괜찮아."

"그거 아니? 사실 10시 30분은 서울에서 그렇게 늦은 시간이 아니야. 무엇을 하든 즐거웠으면 됐고 중요한 건 너의 안전이야. 안전하다면 시간은 괜찮아."

내 얘기를 듣고 제니 얼굴은 금세 밝아졌다.

"홍대는 정말 재미있었어요. 노래방에서 노래를 너무 많이 불러서 목이 아파요."

그렇다. 홍대는 서울의 어느 지역보다 젊고 알록다록 하다. 며칠 전 성수동에 있는 올리브영에 다녀온 제니가 자신의 피부톤을 무료로 체크할 수 있다며 1시간을 기다렸다는 말을 했었다. 안타깝게도 그렇게 기다렸는데 사람이 너무 많아서 돌아왔다고 다음에 또 가야 한다는 말을 했었는데 K-콘텐츠가 전 세계를 열광시키고 있는 요즘 제니의 동선은 그것들과 맞닿아 있었다. 앞으로도 성수동과 홍대는 그녀가 자주 가는 단골 지역이 될 것이다.

"서울에서 모두 다 하려고 애쓰지 마, 다음에 와서 즐길거리도 남겨둬야지."

제니가 내 말에 피식 웃었다.

"시간이 빨리 가고 있어요, 하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아요."

태어나서 지금까지 서울에만 살고 있는 나에게 제니의 말은 뭔가 좀 어색했다. 내가 이태리, 로마, 스위스, 미국 등 선진국에 가서 느꼈던 것을 외국인이 느끼고 있다니 말이다.

"그랬어? 그 말을 들으니 나도 기분이 좋네."

제니가 하늘을 보았다.

"서울은 하늘에 별이 보이지 않아요, 밤에도 너무 밝아서 그래요."

'며칠을 살았다고 어린애가 벌서 그걸 깨달았구나.' 나는 기특한 생각이 들었다.

'밝은 곳을 찾아 즐기는 중에도 이 18살 소녀는 하늘을 보고 있었구나.'


아파트 공원을 가로질러 걸으면서 슬쩍 제니의 어깨를 보았다. 교복하고 너무나 잘 어울리는, 크고 무거운 책가방을 들고 다니길래 어제 아침 평소 자주 쓰던 진 에코백을 주었다. 다른 것은 받아 놓고도 사용하지 않더니 10대 여학생이 가지고 다니기에도 나름 괜찮았던 모양이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으로 올라오면서 무슨 동상이몽에 빠졌는지 각자 입가에 엷은 미소가 떠올랐다.


어머니는 아이가 잘 들어왔는지 확인하고는 내게 앞으로 너무 늦지 않도록 말하라고 하셨다.

"글쎄, 엄마 지금 저 애는 인생에서 중요한 시간들을 여기 서울에서 보내고 있다고요. 어쩌면 10대의 마지막 뜨거운 여름이 될지 몰라요. 그냥 놔두세요."

어머니는 네가 그러면 그렇지 하는 눈빛을 보내고는 다시 방으로 들어가셨다.


그 밤, 그녀와 나의 에피소드 하나가 추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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