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꽉 찬 스케줄이 아무리 버겁다 해도 10대 소녀가 주말에 집에서 푹 쉴리는 없다.
더구나 멀고 먼 나라, 자신의 세계와 완전히 다른 나라, 그리고 최근 세계적으로 핫한 나라에 있으니 말이다.
홈스테이라는 게 숙식 제공이 주목적이지만 나는 뭔가 더 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센터에서 제공하기는 어렵지만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것을 고민하다가 동대문 새벽 시장이 떠올랐다.
"제니, 나랑 동대문에 있는 새벽 의류시장에 갈래?"
"새벽? 몇 시에 하는데요?"
"건물마다 다른데 밤 8시에 오픈하는 곳도 있고 자정에 여는 곳도 있어. 다음날 수업이 없는 금요일 밤이 좋을 것 같은데 어때?
내 제안이 놀랍기도 하고 좋았는지 짧은 고래 소리를 냈다.
"그럼 친구들이랑 같이 가도 돼요?"
"그래, 근처에 사는 친구들한테 물어봐, 그리고 그 집 가족에게도 허락을 받아야 해."
"네, 친구들에게 물어볼게요. 감사합니다."
제니는 가끔 친구들이랑 성수동이나 홍대에 가서 쇼핑을 하는데 그럴 때면 신이 나서 나에게 보여주었다.
"만 오천 원에 프릴이 달린 러블리한 블라우스를 샀다니 한국은 진짜 대단한 것 같아요."
"미국도 좋은 옷이 많을 텐데 왜 한국에서 사는 거야?"라고 물어보면 한쪽 입술을 끌어올리며 씩 웃었다.
"이런 건 없어요. GAP이나 리바이스처럼 박스티거나 디자인이 예쁘지 않아요. 같이 공부하는 친구는 옷을 너무 많이 사서 케리어를 하나 더 샀대요."라고 은근슬쩍 친구 얘기도 해주었다.
나는 친구가 많이 사서 부럽다는 건지 지나치다는 건지 제니의 표정만 봐서는 알 수가 없었다.
"제니야, 근데 밤 시장은 도매라서 우리한테는 팔지 않아. 그래서 사고 싶은 옷이 있어도 살 수 없을 거야, 그래도 괜찮니?" 걱정스럽게 묻는 내게 큰소리로 "YES!"라고 대답했다.
하기야, 새벽에도 왕성하게 깨어있는 그것도 활력이 넘쳐 불야성을 이루는 시장에 가 본다는 것 자체로도 신이 날 것이다. 잔뜩 기대에 부푼 18세 소녀의 어깨는 바람에 떠밀리는 풍선처럼 사뿐거렸다.
드디어 시장에 가기로 한 날, 우리는 지하철 2호선 동대문 운동장역에서 저녁 7시 30분에 만나기로 했다. 친구가 두어 명 같이 온다고 들었고, 물론 그 집 부모님에게 허락을 받았노라고 했다. 시장 구경이 끝나면 제니와 내가 친구들을 안전하게 집까지 데려다주고 돌아오는 길은 택시를 타자는 계획도 세웠다.
나도 왠지 설레었다. 한창 호기심 많은 아이들이 혹시나 돌출행동을 하면 어떡하나 긴장도 됐지만 이곳저곳을 보면서 신기해하고 즐거워할 생각을 하니 몸속 세포들이 활기를 띠는 기분이었다.
낮에 처리해야 할 일을 끝내고 제니와 만날 시간까지 기다리자니 좀이 쑤셨다. 그래서 일찍 가서 미리 동선을 파악하고 출출할 때 먹을 간식거리라도 봐야겠다는 생각에 1시간 일찍 시장에 도착했다.
어랏! 그런데 분위기가 내가 알던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직감하고 여기저기 둘러보는데 모든 건물의 셔터 문이 굳게 내려져 있는 게 아닌가. 문이 닫혔다 해도 오픈 준비 때문에 건물마다 환하게 불이 켜져 있고 사람들이 건물로 계속해서 드나들어야 하는데 움직임도 없고 깜깜했다. 직감적으로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어서 머리가 쭈뼛거렸다. '아이들이 금방 도착할 텐데 어떻게 하지?' 하얗게 된 머릿속을 이리저리 굴려보아도 마땅한 대안을 찾을 수가 없었다. 인터넷 검색이라도 하고 올걸, 동대문 밤시장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했던 내가 원망스러웠다. 그 사이 시간은 흘러 역으로 아이들을 마중 나갈 때가 되었다.
급하게 전화를 했다.
"제니 지금 어디에 있니?"
"미안해요 아직 삼성동 코엑스에 있어요, 친구들 몇 명이 더 가고 싶어 해서 기다리고 있어요. 괜찮죠?"
'아직 출발 안 했어? 다행이다, 근데 더 온다고?' 이런 큰일 났다.
나는 부랴부랴 상황을 설명했다. "내가 한 시간 전에 왔는데 영업은 월요일에서 목요일까지만 한단다.
미안해서 어쩌지, 다음에 다시 와야 할 것 같아."
"네에? 벌써 도착했다고요? 오 마이갓, 감사합니다, OK... 그럼, 다음 목요일에 같이 가요."
나의 희망회로인지 몰라도 제니는 내가 본인보다 일찍 가서 돌아본 것에 감동한 눈치였다.
"너 금요일에 학교에 일찍 가야 하잖아."
"한 번 만이요, 딱 한 번만 데리고 가주세요."
"좋아, 너는 내가 같이 오면 되지만 다른 친구들은 어려울 것 같아."
"괜찮아요. 다른 친구들에게 말 잘할게요. 그럼 오늘 친구들과 놀다가 좀 늦게 들어가도 돼요?"
안된다고 말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 그 대신 집에 돌아올 때 전화하고 조심해야 해."
그날 밤 제니는 거의 12시가 돼서 집에 돌아왔다. 물론 내가 버스역에 나가서 기다렸고 제니는 신나게 놀았는지 다소 피곤한 모습으로 나를 보고 배시시 웃었다.
일주일이 지나 목요일 밤 우리는 다시 새벽 시장으로 향했다. 제일 먼저 예전 유어스라고 하는 동대문 DDP로 갔다. 그런데 웬걸, 첫눈에 봐도 제니 스타일의 옷들이 아니었다. 요즘 인기 있는 걸그룹 패션을 떠올리면 10대 여학생들의 지향점을 읽을 수 있다. 대부분 아주 짧은 청 반바지나 스커트를 입고 상의는 몸매가 드러나는 민소매나 끈나시 탑을 입는다. DDP는 뭔가 타겟층이 다른 것 같았다. 우리는 다시 제일평화, 뉴존 등 영업을 시작한 건물들을 하나씩 둘러봤지만 자세히 보지 않고 휘리릭 지나치기만 했다. 맘에 드는 옷을 발견하고 사고 싶어서 안타까워하는 모습을 상상했는데 내 예상은 완전히 빗나가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은 제니가 성수동에서 쇼핑했던 브랜드가 동대문에도 있었다는 것이다. 도. 소매 모두를 상대로 영업을 하기 때문인지 제법 세련된 인테리어로 주목을 끌었고 토털패션을 취급하다 보니 세계 각국에서 온 쇼퍼들도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은 모두 들고 있는 바구니에 마음에 드는 액세서리나 옷 등을 담느라 바빠 보였는데 우리도 기분이 좋아져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것저것 둘러보게 되었다.
결국 제니는 평소 사고 싶어 했던 청바지와 충동구매한 블라우스 그리고 액세서리를 샀고 나는 벨트를 샀다.
내 옆에 앉아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아이를 어깨로 받치면서 잠실철교를 지났다. 반대편 창문에 비친 내 모습은 밤을 뚫고 철컥거리며 달리는 지하철 소리처럼 역사로 들어서면서 잦아들었다.
우리는 12시가 넘어서 잠실역에 내렸다. 본능적으로 내가 안내해야 한다는 생각에 출구를 짐작하며 엉거주춤 서 있는데 제니가 재빨리 내 팔을 잡아끌었다.
"이쪽이에요."
아무리 불야성 서울이라고 해도 자정이 넘은 지하세계는 어둡고 우울해 보였다. 이 공간에서 저 공간으로 이동하는데 셔터문이 내려져 있었고 제니는 당황하지 않고 코너를 돌았다.
"네가 서울사람 같다." 이렇게 말하며 감탄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봤더니 그저 씩 웃기만 한다.
"우리 택시 안 탔죠?" 내 돈을 아껴주었다는 생각이 만족스러운 모양이었다.
가끔 마트에서 이것저것 사 오는 나를 보면 "저는 이건 잘 먹지 않아요. 다음에는 사지 마세요."라거나 "이것도 먹어볼래?"라고 물으면 "집에 있는 거 먹고요, 다음에 사요."라고 말했었다. 남의 돈이건 본인 돈이건 모두 소중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피곤하지? 내일 학교에 가야 하는데 괜찮겠어?"
"네, 오늘 재미있었어요. 감사합니다."
"나도 정말 재미있었어, 이제 서울은 나보다 더 잘 아니까 다음에 꼭 다시 와 알았지?"
"네, 그럴게요."
우리는 밤 1시가 다 되어 집 앞 버스정거장에 내렸다. 달랑달랑 쇼핑백을 흔들며 끈끈하고 짙은 밤 길을 천천히 가로질러 집에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