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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윈서 Aug 04. 2019

엄마의 ABC 탈출 도전기

그러다가 토익시험 보실라

     7박 9일간 동유럽으로 여행을 다녀오신 엄마가 갑자기 영어를 배우고 싶다고 하신다.

"나도 영어 배우고 싶어, 가이드가 어찌나 영어도 잘하고 똑똑한지 모르는 게 없더라고"  

"어? 모르는 게 없는 거랑 영어랑 무슨 상관이래"

"아니 물건도 사는 거 도와주고 길도 안내하고 호텔에서도 다 알아서 챙겨주고... 그거 다 영어 잘해야 되는 거 아니야? 나는 핸드폰으로 사진 찍어서 톡으로 보내는 것도 잘 못하고 상점 가서 물건 사들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서 우물쭈물했어."

아뿔싸, 일행이 있었지만, 한두 번 자존심이 상하면 더 이상 묻지 않는 성격 탓에 여기저기서 많이 망설이고 걱정하고 그러셨나 보다. 여권을 보니 커버 안쪽에 제대로 쓰지 못한 <여행자 휴대품 신고서>가 아무렇게나 끼워져 있었다. 신청서 곳곳에도 채우지 못한 빈칸이 많았는데 꼭 써야 하는 줄 알고 고민하셨나 보다. 지금까지는 나나 혹은 다른 가족과 함께 비행기를 탔으니 모르셨을 텐데.

"신고할 물건 없으면 안 써도 되는데, 모르면 가이드나 옆사람에게 물어보면 되지, 결국 제출도 하지 않고 들고 나올 거면서..." 말끝이 흐려졌다.

"야, 나 그거 나 혼자 다 썼어, 그런 거 정도는 나도 할 수 있어 뭐가 어렵냐?"

"그래? 와, 그래도 엄마 용감하네 역시 엄 여사 죽지 않았어!!"

"빈칸이 잘못했지 엄마가 잘못했나? 까짓 거 다음엔 나랑 가자." 이렇게 말하고는 9일간 마음속에 서러움과 부끄러움을 감춰두었을 엄마 생각에 마음 한 구석이 아릿했다.



     

     "엄마, 학습지 영어 해보고 싶지 않아? 영어 공부하고 싶다고 했잖아." 나는 TV를 보고 계신 엄마에게 가볍게 툭 한마디 던졌다. 

"그래, 알았어."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대답을 하신다. 뜻밖의 대답에 당황한 건 나였다. 즉각적인 반응에 잠시 머뭇거리고 있는데 "나, 알파벳은 알아, 전에 네가 가르쳐 준거 몇 개는 기억할 수 있어."라며 눈은 TV 드라마에 고정한 채 독백처럼 얘기하신다. 아주 오래전 내가 여행을 자주 다닐 때 서로 이메일을 주고받자고 며칠 동안 알파벳을 가르쳐 드렸던 생각이 났다. "아, 맞다 그랬지? 그때 알파벳 배웠으니까 지금은 조금만 해보면 기억날 거야." 용기를 북돋아 드리기 위해 나는 이런저런 별로 중요하지는 않지만 영어가 배우기 어렵지 않다는 장황한 설명을 늘어놓고 있었다. 내 말이 다 끝나기를 기다려 엄마는 다시 말씀하신다. 

"나도 할 수 있어." 

"......"

"알겠어요, 내가 당장 학습지 알아보고 다음 주부터 선생님 만날 수 있도록 할게요."

"알았어, 고마워."


     며칠 어떤 학습지가 좋은지 알아보고 결정을 하였다. 수업은 1주일에 한번 선생님이 방문하셔서 10여분 남짓 진행을 하는데, 지난 시간 배운 것을 복습하고 새로운 것을 가르치는 형태라고 한다. 일단 목표는 파닉스를 익혀서 글을 읽게 되는 것이다. 영어를 읽을 줄 안다면 길거리 간판을 보는 것도 가능하니 엄마로서는 또 다른 세계가 열리는 효과가 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세상을 반만 이해하고 살아오신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 학습지 결정했어요. 나중에 두말하기 없기다." 나는 쐐기를 박기 위해 일부러 강조하며 말을 했다.

"나도 한다면 한다. 너는 모를 거야, 내가 공부를 한창 열심히 할 때 할머니가 못하게 하셔서 이렇게 됐지 만약에 계속 공부시켰으면 내가 지금의 내가 아닐걸?"

"알았어요, 그러니까 이번에 그걸 보여주시라고요." 엄마의 말에 묘한 느낌이 들어 일부러 파도 타듯이 높낮이를 주며 대답을 했다.



    

     선생님이 처음 집으로 방문하시는 날, 엄마는 낮부터 약간 상기된 모습이었다. 집을 청소하고 부엌을 정리하는가 싶더니 보일 듯 보이지 않을 듯 거울에 자신을 슬쩍슬쩍 비추어 보신다. 나 또한 긴장되었다. 엄마가 잘하실 수 있을까? 혹시 어렵다고 중간에 포기 선언을 하시는 건 아닐까? 그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런저런 생각에 걱정이 들기도 하고 분주하게 움직이는 엄마가 낯설기도 했다. 아무튼 우리는 둘 다 선생님을 기다렸다. 어쩌면 오늘은 일생에 중요한 순간이 될지도 모른다.

드디어 현관 벨이 울렸다.

"안녕하세요 어머니, OOO입니다."

"안녕하세요, 어서 오세요." 엄마는 수줍은 여학생이 되어 있었다.

A의 Apple부터 시작하는 교재를 받았다. A5 보다 조금 큰 10페이지짜리 교재는 책상 위에 곱게 올려졌다.  

"따라 해 보세요 어머니 A, A로 시작하는 단어는 Apple"

"에이, 애플, 애플, 애플... "

"잘하시네요."

부끄러운지 얼굴을 살짝 숙이신다.


     그렇게 10분이 훌쩍 지나갔다. 뭔가를 배우기엔 정말 짧은 10분, 엄마는 행복해 보였고 나도 그랬다.  

선생님을 배웅한 엄마의 손에 살짝 힘이 들어간다. 골대에 골을 넣은 축구선수처럼 세리머니를 하고 싶은 마음을 애써 누르고 계신 것 같다.

"어때요, 어렵지 않지? 할만하지?"

"누가 어렵다고 했나? 할 수 있어."

"그래요, 우리 엄 여사 파이팅입니다."


밤늦도록 안방에 불이 꺼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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