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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윈서 Aug 12. 2019

일상 속의 신독

오늘도 나는 흔들린다

         

     <愼獨> 삼갈 신/홀로 독, 혼자 있을 때에도 도리에 어긋나는 일을 하지 않고 삼간다는 의미의 단어이다.  

또 <내로남불>이라는 단어는 내가 하면 로맨스이고 남 이하면 불륜이라는 뜻으로 같은 일에도 나와 남을 구분하여 결과를 다르게 읽는 모양새를 비꼬는 말이다. 그러니까 신독과 내로남불은 결과를 이해하는 데 있어 개인의 가치관이 반영된 상반된 단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주위 환경에 영향을 받는 경우도 있지만 이 두 가지 잣대로 나 스스로를 반성하거나 대인관계에서 나와 오랫동안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인지 여부를 가늠한다. 솔직히 말하면 신독은 상당히 혹독해서 모든 면에 백 프로 적용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어렵다. 마치 특정 종교의 원리주의자들처럼 끊임없는 자기 검열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것이 내 삶의 철학이라고 큰 소리로 말하기 어려우면서도 냉정하게 떨쳐버릴 수 없는 흠모의 대상이다. 때로는 나를 죄책감에 빠지게도 하고 무기력한 자신을 발견하기도 하며 스스로가 부끄러워 대인관계에 문제가 발생할 때도 있다. 조금 더 심각하게 말하면 신독은 삶의 동력을 잃게 해서 심리적으로 회복하기 어려운 우울증에 빠지게 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내가 신독을 사람을 이해하는 도구로 쓰고자  하는 것은 큰 대의나 명분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저 일상의 사소한 일들을 이해하는 개인의 본질적인 자세를 알고자 하기 때문이다.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여된 사람들이 최소한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사과하는데 주저하지 않는 모습을 보고 싶고 나 자신에게는 조금 더 강하게 적용하고 싶은 것이다. 그것이 나에게는 평화이다. 며칠 전의 에피소드 하나가 떠오른다.




Lady Godiva, John Collier, 1898, Courtesy of the Herbert Art Gallery & Museum, Coventry  [출처] 

     8호선과 9호선의 환승역인 석촌역은 출퇴근 시간이면 어느 역과 마찬가지로 푸시맨이 필요할 정도로 사람들이 많다. 기존의 8호선과 더하여 2018년 12월 개통된 9호선은 중앙 보훈병원에서 김포공항을 지나 개화역 사이를 운행한다. 길을 사람을 불러오고 9호선 라인에 거주하던 사람들이 석촌역에서 잠실방향이나 수원 방향으로 움직이기 위해 몰리다 보니 아침시간은 언제나 수도꼭지에서 뿜어져 나오는 물처럼 쏟아진다. 그날은 유난히 피곤해서 지하철을 기다리는 순간조차 뒤에 처져 눈을 감고 몸을 기대고 있었다. 조금씩 밀며 밀리며 지하철을 타서 어느 여자분 앞에 서서 손잡이를 잡고 있는데 다음 정거장에서 할머니 한 분이 타서 내 옆에 서게 되셨다. 누가 일어나 자리를 양보할까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모두들 피곤한 기색으로 눈을 감고 있거나 스마트폰을 보고 있을 뿐 아무도 할머니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물론 가끔 자신이 내릴 정거장을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들지만 할머니는 그저 풍경의 하나일 뿐이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다리가 아파 엉거주춤 서 있는 모습을 할머니에게 투영시켰다. '나도 이렇게 다리가 아픈데 할머니는 얼마나 아프실까. 몇 분을 편하겠다고 아무도 일어나질 않는다는 말인가, 참 얄미운 사람들이다'라고 생각하며 나도 모르게 아침 출근의 짜증을 앉아있는 사람들에게 밀어내고 있었다. 단순히 이해 불가를 넘어 어느새 앉아있는 사람들의 도덕성과 개인 인성 그리고 교육의 부재까지 확장해서 생각하는 바람에 지하철은 새처럼 날아서 복정역에 도착했다. 


     서둘러 분당선으로 갈아타서 자리를 살펴보았다. 복정역 다음이 가천대역인데 학생들이 주로 하차하기 때문에 습관적으로 앉아 있는 승객들 중에서 대학생으로 보이는 사람 앞에 서서 손잡이를 잡았다. 한 노선을 몇 년 타다 보면 요령이 생겨서 적중률이 꽤 높은 편이다. 다행히 그날도 학생이 내리길래 자리에 앉았다. 아, 너무 편하고 좋다. 스르르 눈을 감고 순간을 즐기며 편하게 앉아있는데 축지법을 쓰셨는지 어느새 내 앞에 어르신 한 분이 서 계시는 게 아닌가. 아, 이런 낭패가 있나. '나는 이제 막 온몸이 쑤시고 특히 다리가 아프고 오늘따라 더 피곤한 중년의 키 작고 체력이 부실한 여자다.  어르신은 왜 내 앞에 서 계시는가 말이다. 지하철 오래 타셨으면 나 같은 사람은 지나치고 다른 건장하고 건강한 사람 앞에 서 계셔야 좋다는 걸 아실 텐데, 혹시 지방에서 오셨나? 온갖 생각에 머리가 복잡해졌다. 아, 그러고 보니 몸만 피곤한 게 아니라 머리도 아팠구나. 나는 오늘 일어설 여력이 없는 사람이다.' 부끄럽게도 눈을 감아버렸고 그렇게 10여분이 흘러 목적지 역에 도착했다.  


     다리가 편했으니 된 건가? 나에게 말을 걸어보았다. '좋았냐?'  

나는 약자를 보면 자리를 양보해야 한다는 다소 강압적 윤리의식을 주입받은 세대이다. 그렇다 해도 요즘의 지하철 풍경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시간이 흐르면 풍경도 바뀌고 그 풍경은 시대적 인식에서 나오지 않던가. 그저 나보다 약자를 보면 양보를 하는 것이 좋다는 일반적인 소양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정도이다. 그런데 그날은 출근시간에 두 가지의 상반된 나를 보았다. 그 시간차가 너무 야속하다는 생각도 들지만 시간은 비난의 대상이 아니다. 지하철 자리 하나 가지고 거창하게 <신독>을 꺼내 든 것이 좀 지나치다 생각이 들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나는> 이렇게 살아야겠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서 오늘 일은 정말 부끄러웠다.

게다가 지하철을 갈아타기 전 양보하지 않은 사람들을 속으로 비난하지 않았던가. 그야말로 '내로남불'의 전형이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출구로 나가는 동안 내내 자괴감이 들었다.


     내적 갈등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특정 행동을 결정하도록 하는 요인은 유. 무형의 이익의 크기 일 것이다. 그 크기가 결정에 대한 후회를 낳기도 하고 당위성을 설명하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때로는 옳고 그름을 판단함에 있어 자신의 이익을 생각하지 말아야 할 때가 있다. 그 날 나는 <내로남불>의 전형이었다. 내적 갈등에서 패했으며 타인을 비난하는 바보 같은 짓을 저질렀다. 10여분의 다리 휴식은 내게 큰 이익도 아니고 부끄러움을 상쇄할 만한 아무 근거도 되지 못했다.  다시 나에게 <신독>을 꺼내 든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옳은 것에 나를 이용하는 것이다.>  작은 일은 큰 일로 연결하는 시작이니 고작 10여분이라고 치부하지 말자. 잘못한 것을 인정하는 것 또한 <신독>이다. 


반성은 더 깊은 사람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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