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어느 별에서 살까?
이승윤
밤하늘 빛나는 수만 가지 것들이
이미 죽어버린 행성의 잔해라면
고개를 들어 경의를 표하기보단
허리를 숙여 흙을 한 움큼 집어 들래
방 안에 가득히 내가 사랑을 했던
사람들이 액자 안에서 빛나고 있어
죽어서 이름을 어딘가 남기기보단
살아서 그들의 이름을 한번 더 불러 볼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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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생략-
지난 주말 번개 놀이를 했다.
연휴 첫날 아침이라 그랬을까, 눈을 뜨자마자 무언가 해야겠다는 묘한 의무감에 사로잡혀 화분을 정리하고 계신 엄마를 재촉해서 동서울 터미널로 날아갔다. 곧바로 떠날 수 있는 바닷가를 검색해 보니 10분 후에 출발하는 <강릉>행 표가 딱 2장 남아있었다. 재빠르게 표를 사서 플랫폼으로 뛰었다.
고속버스도 연휴에 어딘가를 가본 것도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이다 보니 강릉행 플랫폼이 하나가 아니라는 사실은 생각하지도 못했다. 비스듬한 삼각형 모양의 출발 구역을 이리저리 뛰어 불과 10여 초를 남기고 헐레벌떡 버스에 올라탔다. 긴장이 풀린 두 다리를 의자에 털석 올려놓고 우리는 마스크를 들썩이며 실없는 웃음을 킥킥 웃었다. 숨이 찼지만 기분이 괜찮았다.
몇 해 전이었다.
당시 독립해 살고 있던 내게 늦은 밤 전화가 걸려왔다. 사촌오빠한테 다녀왔다는 이야기를 전하시려나 생각했는데 뜻밖에 엄마가 이름을 바꾸고 싶다고 하셨다.
"야아, 나 이름 바꾸고 싶은데 그래도 돼?"
"이름? 갑자기 왜?"
"아니, 전부터 바꾸고 싶었는데, 니들이 이 나이에 개명이 뭔 소용이냐고 타박할까 봐 말을 안 했었어."
"그랬었어? 아니 그게 뭐라고 엄마, 바꿔 괜찮아."
내 반응에 엄마는 한껏 상기된 목소리로 몇 번이나 정말인지 되물으셨다.
"난 네가 화낼까 봐 엄청 떨었어. 흑,,," 전화기 넘어 엄마 목 끝에서 울음이 새어 나왔다.
물론 알고 있었다. 당신 이름을 전할 때마다 기본적으로 4-5번을 반복해야 했고 그때마다 부끄럽다고 하셨다. 옛날에는 출생 신고할 때 이름 틀리는 건 일도 아니었다고, 음은 같아도 한문이 다르거나 아예 처음부터 엉뚱한 이름이 되기도 해서 여자 이름은 미자 숙자 말자가 흔했다고 하셨다. 우리 형제가 엄마 이름이 이상하다고 놀린 적도 없는데 언제나 당신이 먼저 서둘러 변명을 장황하게 해서 질문할 틈을 막아버리셨다.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감정에 동요가 오다니, 먹고 싶은 음식 대신 침을 꿀떡 삼키던 엄마들만의 변명 같은 거라고 생각했다. 가슴이 뜨겁게 뭉클해지는가 싶더니 눈두덩이가 뜨거워졌다. 한 번도 귀담아듣지 않았다는 부끄러움이 후회와 함께 밀려왔다.
"엄마, 난 당연히 괜찮지. 요즘에는 이름 바꾸는 건 일도 아니야. 주민등록번호도 바꿀 수 있고 이민 가면 국적도 바꾸는데 이름이 뭐가 대수라고. 걱정 말고 바꾸세요."
"그렇치이? 나 너무너무 너어~무 바꾸고 싶었어."
"그럼요. 이담 세대 사람들은 화성에서 살까, 지구에서 살까 그럴지도 몰라. 자기가 사는 별도 바꿀 수 있는 날이 올 텐데 뭐."
신이 난 엄마가 두어 개 작명소에서 받아 온 이름을 내밀었다.
(아, 엄마는 다 계획이 있으셨구나. 하하하)
결론은 엄마는 이름을 바꾸지 않으셨다. 이러저러한 서류를 준비하고 이제 법무사에 가서 접수만 하면 되는데 이걸로 되었다며 마지막 순간에 내려놓으셨다.
나는 속으로만 울었다. 개명이 뭐라고 용기까지 필요할까.
버스에서 진동벨이 울렸다. 볼륨을 한껏 키워놓은 탓에 상대방 목소리가 쩌렁쩌렁 옆자리까지 들려왔다.
"아이고 OOO여사 뭐하셔, 오늘 만나고 싶은데 시간 괜찮은가?"
허엇, 'OO이라면 그때 작명해온 이름 중에 하나인데 이상하다앗?' 풉, 웃음이 터져 나와 슬그머니 눈을 창가로 돌렸다. (역시 계획이 다 있으셨어.)
사실 엄마 이름 개명 소동은 내 이름 개명으로 끝이 났다. 용기를 북돋는 의미로 혼자 하기 쑥스러우면 같이 하자는 내 제안에 옳다구나 이름을 지어와서 당신 것 대신 내 서류를 접수하신 거다. 덕분에 나만 이상한 모양새가 되었는데 어디 가서 개명 이유를 설명하면 다들 효녀라며 추켜세우는 덕에 괜히 쥐구멍만 찾는다.
주어진 이름으로 살아오느라 다른 생은 생각지도 못한 속상함이 있다면 나는 이름을 바꿔볼 것을 권한다. 수없이 불리는 이름이 광활한 우주의 행성처럼 각자의 별이라면 가끔은 이사를 가는 것으로 신선한 공기를 마셔보길 권한다. 혹시 내가 살고 있는 별이 만족스럽다면 그래도 여행을 해보기를 조언한다. 매일 아침 일어나 거울을 볼 때 다른 배역을 맡아 잠시 동안 살아가는 배우들처럼 어제와 다른 나로 살아가도 좋지 않을까.
내 이름이 다르게 된 첫날, 운전을 하는데 잠그다만 수도꼭지처럼 눈물이 새어 나왔다. 낯선 이름을 선뜻 불러올릴 수가 없어서 한동안 수면 아래에 두면서 지인들이 불러주는 걸 남의 일처럼 바라보았다. 나보다 더 신경 써주는 상대방에게 감사하면서 그런 상황을 관조하기만 했다. 그렇게 겨울 나뭇가지가 무성해질 때 즈음, 가슴에 명패를 달게 되었다. 드디어 새로운 보금자리 별이 된 것이다.
하지만 예전 이름의 글자 하나만 같은 사람을 만나도 설렘에 잠시 머뭇거린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그 주변에서 뱅뱅 돌기도 하고 얕은 심호흡으로 잠시 흔들리는 마음을 추슬러야 움직일 수 있다. 사랑함에도 헤어져야 했던 남자 친구를 떠올릴 때처럼 잔뜩 미련을 부려보기도 한다. 그러함에도 후회하지는 않는다. 이름이 문제가 돼서 바꾼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내 가슴에 여전히 살아있어서 그럴 뿐이다.
오늘도 나는 두 이름을 10번씩 불러본다. 하나이지만 둘이고, 둘이지만 하나인 쌍둥이 행성을 품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재미있는 일인지를.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