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그림을 배워보자는 결심을 하고 동네 문화센터에 등록하려고 신청 당일 컴퓨터를 켰다.
소묘, 수채화, 유화, 인물 스케치 기초 등은 있었지만 <선긋기> 교과목은 없었다.
여기저기 기웃기웃 방황하는 사이 거의 모든 과목에 신청 완료 표시가 떴다.
'이건 무슨 일이냐 대체.'
<인물 스케치 기초>만 남았다.
수업 첫날, 선생님이 "소묘는 다 잘하시죠?"라고 당연한 듯이 물으셨다.
"네?"
"그럼 어떻게 수강 신청하셨어요?"
"기초라고 해서요."
모두들 시원하게 웃기 시작했다.
나는 '대체 뭐가 문제인 거지?'라고 속으로 중얼거리기만 했다.
얼굴형을 연습하는 것을 시작으로 눈, 코, 입, 귀, 머리카락, 그리고 합체의 과정이 이어졌다.
그런데 다른 것은 선을 이용하기 때문에 모양이 나는데 코는 그렇지 않았다.
콧볼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소묘의 명암을 통해 표현해야 오뚝한 코가 되는 것이다.
내 손은 방황하기 시작했다. 연필은 계속 허공을 찌르고, 심장은 두근거리고, 콧등은 짜부러
지기 일수였다. 좀처럼 콧대가 살아나지 않고 시커먼 연필과 지우개 똥이 스케치북을 전쟁터로 만들었다.
"어, 코가 왜 이래요? 다시 한번 보여줄 테니 잘 보세요."
선생님이 내 스케치북 위에 잠시 머물을 뿐인데 주저앉은 코가 높이 솟아올랐다.
"아셨죠?"
영혼이 가출해버렸다.
믿는 구석이 있었다.
남동생이 순수미술은 아니지만 그림을 업으로 하고 있으니 차근차근 친절하게 설명을 해줄 것이다.
손목 움직임이나 연필 각도도 잡아줘서 쓸데없이 힘이 들어가는 부분도 해결될 것이다.
그놈한테 나는 가족이고 어린아이처럼 헤매는 모습을 안타깝게 여길게 분명했다.
나. 뿐. 시. 끼
카톡으로 내가 그린 그림을 보여주며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물론 맛있는 것도 사줄 생각이었다.
"오늘 그린 코야."
"하하, 모양이 나오네요."
"나 좀 도와줘라, 콧대를 못 그리겠어."
"원통을 연습하면 됩니다."
파일이 하나 날아왔다. <소묘 연습>
"이렇게 하면 됩니다."
"자료가 없는 게 아니라 봐도 뭔 말인지 모르겠다고."
"계속 그리면 됩니다."
"너는 잘하니까 그렇지 나는 설명해도 뭔 소린지 몰라."
......
"도와줄 게 없어요, 이대로 따라 하면 됩니다."
"됐어."
분노가 솟구쳤다.
너는 듁.었.어.
내가 전시회에 가서 그림을 감상하는 건 이상이고
코가 무너진 건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