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물을 찾아보았다.
문화센터 미술수업 첫날은 어디나 그렇듯 자기소개 시간이었다.
학교 선생님으로 은퇴하신 여사님, 자식들에게 사업체를 물려주신 노신사, 전업주부들, 대책 없이 직장을
그만둔 나, 이렇게 총 10명이 이젤을 앞에 두고 2줄로 앉았다. 다들 긴 인생 동안 스토리를 갖고 살아오신
덕분에 인사말을 길게 천천히 잘하셨다.
나도 수강신청 동기 등을 이야기했지만 짧았던 모양이었다. 몇 가지 질문이 들어왔다.
"그림은 얼마나 그리셨어요?"
"처음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오셨지요?"
"기초라고 해서요."
선생님은 당황스러운 표정이었다.
"하하하, 네에, 잘 오셨어요. 아무리 기초라고 하지만 초상화는 소묘가 어느 정도 돼야 하는데 용기를
내셨다니 박스를 쳐 드리겠습니다."
"...... 감사합니다."
오늘이 월요일이던 일요일이던 전혀 상관없는 백수생활이 2개월째 접어들고 있었다.
이제 좀 외부환경에 슬쩍 발을 담가볼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동네 문화센터를 찾아갔다.
'하하, 참나 대낮에 문화센터를 찾는 날이 오다니.'
POP 꽂이에 팸플릿이 가득 채워져 있는 걸 보니 코로나로 중단되었던 클래스가 개강을 앞두고 있나 보다.
안내소 직원은 홈페이지에 회원 등록을 하면 원하는 강의를 신청할 수 있다며 소형 안내장을 내밀었다.
초상화 기초반 등록에 성공했다. 다른 과목은 신청 시작 5분 만에 마감되었는데 여유가 있었으니 상대적으로 인기가 덜한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소묘, 수채화, 유화, 캐리커처 등 다른 과목들은 그리는 방법만 결정될 뿐 대상은 정해지지 않았는데 인물화 기초는 <인물>로 대상까지 정해진 셈이었다.
물론 나에게는 나쁘지 않았다, 선택은 더 복잡하게 할 뿐이니까.
결론부터 얘기하면 <기초>라는 단어가 주는 용기는 나를 새로운 세상으로 안내했다.
첫 시간은 얼굴형과 눈코입 배치를 배웠다. 처음에는 동그란 원을 그리고 정확히 중간에 가로세로 선을 교차
시킨 후 중앙을 중심으로 3등분을 한다. 여기에 눈코 입이 들어갈 자리를 잡고 달걀 모양으로 갸름하게 전체 모양을 잡아주면 얼굴 윤곽이 드러난다.
"여러분, 무작정 열심히 그리는 것은 시간낭비예요. 잘못된 방법으로 아무리 열심히 그려봐야 다 지워야
해요. 우리 인생도 그렇지 않나요? 열심히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올바른 방법으로 열심히 해야 합니다.
천천히 비율을 잘 보고 그려보세요."
선생님은 수업 속에 인생살이 진리를 녹여내셨다. 큰 기대 없이 참가한 수업인데, 할 말 많은 50대 여자 선생님 잔소리는 새겨들을만했다.
낚시하듯 건져 올린 명언들이 싫지 않았다.
길거리에서 데이트 폭력을 목격한 일이 있었다. 분노에 차서 여자 친구 뒷덜미를 움켜잡고 질질 끌고 가던 남자는 여자를 한쪽 구석에 아무렇게나 몰아세우더니 주먹을 세차게 휘둘렀다. 경찰이 그 둘을 갈라놓고 나서야 숨 막히던 순간이 끝났다. 내 사회생활이 꼭 그랬다. 몸이 아픈 건 나중에 알았다. 남들은 다리를 질질 끌고 다닌다며 안타까워했지만 정작 내 영혼이 기절 직전인 건 알아채지 못했다.
너 혼자 사회생활을 하냐고 눈을 흘기는 사람도 있었다.
두 번째 시간은 눈을 그렸다.
눈동자를 새까맣게 칠하고 눈썹을 마지막으로 그럴듯하게 그리면 제법 보기 좋은 눈이 되었다.
지우개로 까만 눈동자를 살짝 지우니 초롱초롱한 순정만화 주인공 눈이 되었다.
선생님은 수강생이 그린 눈들을 하나씩 살피더니 팔을 허공에 휘두르면 말씀하셨다.
"아래 눈썹은 점막 밖에 그려야지요.
모두들 점막안에 눈썹을 그렸다고요. 모든 것은 있어야 할 자리에 놓여야 합니다.
눈썹 그리고 싶어서 위치도 살피지 않고 그렸죠? (하하) 다 알아요. 여러분, 자기 자리 찾아주자고요."
긴 눈썹은 가늘고 기다란 손가락만큼이나 순정 만화에서 미덕이다. 마음이 급했구나.
더위가 절정에 이르렀다. 올해는 매미가 별로 없다더니 제법 나이 먹은 나무들로 우거진 동네 놀이터를 돌아오는데도 조용했다. 코로나 때문에 빨간 테이프로 꽁꽁 묶인 운동기구들을 보니 느낌이 더 이상했다.
주로 할머니들이 삼삼오오 모여 노시던 그늘막 평상도 출입금지 테이프가 둘러쳐 있었다.
여기에 계셔야 할 할머니들은 이 시간 어디에 계신 걸까.
쓸데없는 생각이 드는 것을 보니 뇌가 텅 빈 것이 분명했다. 나쁘지 않았다.
세 번째 시간은 코를 그렸다.
문제는 <코>였다.
얼굴형이나 눈과 다르게 코는 구멍 두 개와 그것들을 감싸는 대괄호를 제외하면 연필의 명암만 가지고 표현해야 했다. 머릿속에서 '난감하네에~' 노랫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아니 이게 무슨.... 코뿔소 코야?" 내가 그린 코를 본 사람들은 모두 말을 끝내지 못했다.
최대한 집중해서 배운 대로 열심히 그려보았지만 좀처럼 콧대가 살지 않았고 균형도 맞지 않아 한쪽이
찌그러져 보였다.
선생님이 보시더니 "어~..." 난감한 모양이었다.
"자, 원통을 그려봅시다. 코는 원통을 그리는 원리예요. 원통하고 구를 그리면 좀 나아질 겁니다."
"아 그전에 연필 잡는 법하고 선긋기를 먼저 알려줄게요."
선 색깔이 1에서 10까지 명암을 가지고 이어지는 모습이 신기했다.
아직까지 몽둥이로 두들겨 맞은 것처럼 온몸이 매일 아팠다.
아침에 토마토 주스를 마시고 집 근처 인근 호수가를 걸었다.
처음에는 10분만 걸어도 덜컥 주저앉더니 30분 정도 버틸 수 있게 되었다.
기뻐서 친구들에게 자랑삼아 문자를 보냈다. 꼭 내가 그린 코 같다는 생각을 했다.
문화센터는 3개월 단위로 수강신청을 하니 내게는 시즌 2가 시작되었다.
매번 별도로 원통을 그려서 수정을 받던 나를 생각하셨는지 첫 수업에는 사과를 그려보자고 하셨다.
나는 선배가 되어있었다.
새로운 수강생이 질문을 했다.
"선생님, <선>도 어려운데 사과를 그립니까?"
"못해도 괜찮습니다. 사과를 그리면 입체감과 명암에 대한 느낌이 올 거예요. 그게 중요하거든요."
아, 이런 걸 <신비>라고 하는구나. 뛸 듯이 기뻤다.
사진을 찍어서 카톡 친구들에게 보여주었다.
"이게 뭐 같아?"
"사과!"
"배 아니고? 오렌지 아니고? 복숭아 아니고? 사과 같아?"
"얘 왜 이러니, 아니 사과 구만 웬 딴소리야?"
"오메, 성공이다 야. 이 사과 내가 그렸어, 내 사과라고!!!!!!!"
그런 거 있지 않은가, "어휴 별말씀을, 저 잘 못 그려요. 헤헤헤" 이러면서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얼굴을 붉히는 장면 말이다.
'누가 작가라고 했나? 나 그냥 남들이 알아보는 사과를 그릴 줄 안다고.'
그런데, 코는 여전히 어렵다.
몸도 마음도 나아지고 있다.
분명히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