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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윈서 Dec 15. 2021

지는 것도 나쁘지 않네.

월드 피스 !

타협이나 설득은 원형 테이블 같은 전형적인 공간보다 매일 부딪히는 일상 속에서 더 많이 이루어진다. 

그래서 나는 각 잡고 어깨 뽕 들어가는 일뿐만 아니라, 사소한 일상에서도 조율을 잘하거나 상대로부터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사람들이 정말 부럽다.  

그건 분명 침묵의 순간을 견디지 못하고 언제나 마지막 순간에 두 손을 들어버리는 성격 때문일 것이다.

변명거리는 있다.

'뭐가 대수라고, 월드 피스!'


특별히 불합리하지 않다면 내 주장을 철회하고 상대방 쪽으로 기울어지게 내버려 두는 것이 편하다.

물론 상대에게 나약하거나 소심한 사람으로 보일까 걱정되는 것도 사실이다. 

한번 굳어진 이미지를 바꾸는 것은 시간이 노력이 많이 필요하니 말이다.

그런데 최근에 이런 태도가 오히려 긍정적으로 반전되는 사건이 하나 있었다.  




"자원봉사를 하려면 재능이 있어야 돼.  하다못해 무료급식센터에 가도 요리를 못하면 설거지랑 청소만 

하다가 와야 하는데, 체력이 부족하면 그것도 주변 사람들한테 민폐야.  그러니까 뭔가 재능을 찾아서 키워봐."

'헉, 세상에 내가 무료봉사를 한다는데 돈들이고 시간 들여서 뭔가를 배워야 하는 거야?  

이 사회는 어디서나 공부를 시키는군.  씁쓸하다.'

전문적인 기술이나 경험이 필요한 분야에서 봉사를 하고 싶다면 당연하겠지만 의사나 변호사 일을 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도서관에서 책 정리를 하겠다는데 문헌정보과 전공이나 도서관 사서 경력이 필요했다.

지역구에서 운영하는 박물관에서 안내를 하는 자리에 지원을 하려고 했더니 역사 전공자를 요구했다.

"아니야, 도서관 책 정리는 사서가 하는 전문분야라고."  

"박물관 안내? 그냥 팸플릿만 나눠주고 위치 안내만 하는 자리가 아니니까 그렇지."

세상에 뭐가 그리 팍팍한 건가 은근히 짜증이 났다.

"배우면 되지 시간이 많이 걸리는 건 아니잖아.  주위에 동료나 선배도 있을 테니 하겠다는 마음만 있으면 

얼마든지 단시간에 체득할 수 있는 거 아니야?  안 한다 안 해, 정말 기분 상해서 말이야."


어느 시민단체에서 운영하는 중고물품 관리 및 매장 운영 자리를 찾아 지원했다.  

매주 월요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2시까지 4시간을 봉사하고 중간에 10~15분 간식 타임을 주는 것이 

조건이었다.   이 기관의 설립 목표는 보육원에서 자립하는 19~20세 정도의 독립 가장을 지원하고 기타 어려움에 처한 저소득층을 보살피는 것으로 지역 내 거주하는 주민들이 중고 물품 기증으로 운영된다고 한다.

이것도 경험이 없어서 혹시나 거절당할까 봐 내심 조마조마했는데 다행히 초보자도 상관없다고 하니 

마침내 나도 쓸모 있는 봉사를 할 수 있겠구나 싶어서 기대가 되었다.


봉사 첫날 매장 구성은 직원인 매니저 1명과 5명의 봉사자들로 이루어졌는데 스타벅스 보다야 작지만 버금

가는 매장인데 책임 직원이 1명이라니 이게 가능한 일인가 싶어서 내심 놀라웠다.

어찌 되었든 일은 시작되었다.  - 아침 10시까지 가서 매장 청소를 하고 당일 들어온 물건을 매대에 진열한다.

계산대에 있다가도 흐트러진 매대가 보이면 정리하고 다른 손님이 들어오면 발열체크 등을 안내한다.  

빠진 물건은 채워 넣고 은행일을 보거나 동료 봉사자들의 점심을 사기 위해 밖으로 나가기도 한다. -

4시간 동안 계속 서서 움직이다 보면 둘레길을 걷는 것보다 훨씬 몸에 무리가 가서 힘들었지만 

즐겁고 보람된 시간이었으니 마음은 가벼웠다.




그런데 이번 활동을 통해서 봉사자로서의 경험 외에도 그동안 가졌던 <팍팍한 봉사 자격 조건>이 

왜 필요한지 이해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어느 날은 봉사자 7명이 몰려서 매니저까지 총 8명이 일을 했는데 너무 많은 인력 때문에 분위기가 어수선

해지는 일이 있었다.  어느새 세 번의 경력이 쌓이다 보니 매니저의 동선과 말이 눈에 들어왔다.

"오늘 처음 오셨으니, 제가 알려드리겠습니다."를 시작으로 "여기 옷은 색깔별로 진열해 주세요, 이쪽은 깨지는 물건이니 주의를 해주세요, 계산을 할 때는 이렇게 저렇게,,, 카드 사용과 환불은 이렇게 저렇게,,, 

손님 질문에는 이렇게 대답하고 ,,,, " 

매니저는 같은 말을 계속해서 반복하고 있었다.  A에게 했던 설명을 조금 늦게 온 B에게도 하고 A가 주어진

일이 끝나면 그다음 일을 주문하고, C에게는 계산대를 맡겼는데 화장실에 가는 바람에 B에게 처음부터 다시

설명을 해야 했다.  물론 매뉴얼 책자는 있었다.  그런데 누가 그 책을 찾아 읽겠는가.

'저러다 매니저 목에 핏줄이 터질지도 모른다.'

봉사는 하루만으로 끝내는 사람도 있고 몇 주 혹은 몇 달을 반복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렇더라도 대게 일주일에 한 번 정도만 참여하기 때문에 계산 관련 일은 잊어버리거나 특이사항 때문에 

매니저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일이 계속 발생했다.  

결국 정작 본인의 업무는 손도 대지 못하는 것을 보니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매장 일도 이러니 다른 분야에서는 훨씬 심하겠구나.'


그동안 나는 철저히 기여자 입장이었기 때문에 물처럼 자연스럽게 흘러야 하는 업무에 봉사자 문제가 

생기면 모두에게 피해를 입힌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아무리 봉사단체라 해도 인력을 자원봉사자로만 구성하는 것이 옳은가는 별개로 배치된 인력을 훈련시키고

익숙해질 때까지 기다려줄 시간이 없는 것이 문제였던 것이다.   현장은 언제나 동태적이다.  

그제야 봉사자의 전문성이 수혜자들이 받을 혜택의 질을 떨어트릴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론이 경험으로 전환되는 순간 이해력의 순도가 높아진다.

기관이 언제나 봉자들로 넘칠 거라는 생각도 깨졌다.  달랑 한 명뿐이거나 아예 없어서 매니저 혼자 

일을 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봉사자의 조달과 적절한 배치도 기관이 풀어야 할 숙제인 셈이다.




몇 명이 모여서 봉사 날짜를 조정하기로 했다.  

그런데 사람은 생활패턴이 비슷하기 때문에 원하는 날도 그런 모양이었다.  기관에서 원하는 요일과 시간은

애매해서 서로 눈치를 살피는 중이었다.  누군가 먼저 나서 주기를 바라면서 다들 머쓱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어떤 사람은 안된다는 말만 작은 목소리로 흘리고 어떤 사람은 머리를 긁적거리기만 했다. 

나는 이런 경우 못 참는다.  나중에 처리해야 할 일이 생겨서 귀찮아져도 일단은 그런 분위기를 벗어나야

마음이 편하다.  게다가 봉사일정을 바꾸는 일은 어렵다고 단호하게 말하는 사람도 없는 상황에서 마냥 

기다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제가 바꿀게요."

'아, 또 내가 먼저 말해버렸네.'

다들 씩~ 웃더니 흩어져 버렸다.

..................


찝찝한 마음과 달리 기관에서는 나를 굉장히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사람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매니저가 나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더니 점점 <소중한 사람>이 되고 있었다.

'나는 그런 용의주도(?)한 사람이 아니고 월드피스! 를 좋아할 뿐이에요.'라고 생각했지만 

한편으로 자신감이 생겼다.  상대에게 져주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구나.  

오늘도 자신감 하나를 건져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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