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첫 인사 -
나는 지금 커피숍 2층에서 창이 마주 보이게 배치된 의자에 앉아 정면으로 보이는,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 잎들을 보고 있다. 층층이 겹겹이 쌓이고 겹쳐진 나뭇잎들이 살랑살랑 부딪힌다. 습한 날씨지만 입추가 지나서인지 바람은 어제와 다르다. '절기란 참 과학적인가 보다'라는 생각을 하며 멍 때리고 있는데 갑자기 기억에 전혀 없었던 생각 하나가 쑤욱 머릿속으로 들어왔다.
그는 카피라이터였다. 같은 층에서 일하고 있지만 업무가 다르다 보니 엘리베이터나 복사기 앞에서 가볍게 목례를 할 뿐 친분을 쌓을 기회가 전혀 없었다. 기회만 없었던 게 아니라 관심도 없는 사람이었는데 가끔 먼 거리에서 동료들과 대화하는 소리가 들려오면 좀 지루한 타입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아무튼 그는 많은 구성원 중 하나였다.
어느 날, 1박 2일 워크숍이 있다는 알림이 게시판에 올라왔다. 기억나지 않은 어딘가에서 분임 토의도 하고 저녁도 먹고 그렇게 지나고 서울로 올라오는 버스 안에서 - 회사에서 단체로 움직일 수 있도록 버스를 대절했었다. 집이 어디든 광화문에서 출발하고 광화문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가 혼자 앉아 있는 내 옆자리로 갑자기 옮겨 앉았다. 버스는 종로를 지나고 있었는데 창 밖으로 보이는 가로수가 꼭 저렇게 흔들리고 있었다. 술 냄새가 훅 주위 공기를 오염시켰고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버렸다.
"OO 씨 뭐를 그렇게 보세요?"
"그냥요, 특별히 보는 건 없는데요."
퉁명스럽게 대답하는 나와 달리 그는 술 때문인지 진지했다.
"창밖에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가 있잖습니까? 그건 그냥 흔들리는 겁니다."
"네?"
"그냥 흔들린다고 생각하면 그 자체로 살아있는 거예요."
"........."
그는 창 밖 나뭇가지를 손으로 가리키며 내 가까이로 붙어 앉았다.
술 냄새, 느린 몸짓, 1박 2일의 끝 어느 것 하나 그와 나 사이를 긍정적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아...."
몸을 창 쪽으로 옮기면서 고개를 돌렸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이라고 글로 옮기는 순간 그것은 죽은 것이 돼요. 그러니까 그냥 생각하고 말을 하면 아직 살아 있지만 글로 옮기는 순간 글도 흔들리는 나무도 죽어버린다고요."
"네에에에 .....? "
'아, 정말 미치겠네'라고 속으로 생각하면서 나를 구해 줄 사람이 없는지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보았지만 모두들 피곤한지 잠이 들었거나 자기 생각에 빠져있었다.
이 사람 스스로 자리를 떠나길 바랄 뿐 방법이 없었다.
그렇게 몇 마디 다른 얘기를 했던 것 같지만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멀쩡한 나뭇잎도 글도 왜 죽었다고 하는지 전혀 이해해지 못하겠는데 자꾸 비슷한 말을 반복하는 그가 너무 부담스러웠다.
내 반응에 민망했는지 아니면 실망스러웠는지 그는 다행히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몇 개월이 지났다.
어느 날 퇴근 무렵, 그는 내게 얇고 작은 책 한 권을 건네면서 수줍어했다.
"시집 한 권을 냈는데 다른 사람한테는 얘기하지 않았어요.
OO 씨한테 드릴 테니 시간 있을 때 한번 읽어보세요."
"아.. 네.. 감사합니다."
얼마 후 그는 회사를 떠났다.
그의 시는 몇 번 읽어보았지만 어렵기만 했다. 그만의 심오한 생각을 철학적 단어들로 응축시켜 놓았고 비유들도 낯설어서 한 두 페이지 읽다가 오른쪽 두 번째 서랍에 넣어 두었다.
물론 내가 이해를 못 할 뿐 많은 생각과 고민 그리고 열정이 만들어 놓은 작품이라는 생각은 들었다.
그래서인지 한참을 없애지 못하다가 회사를 그만두면서 다른 책들과 함께 버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매일 시체같이 죽어있는 글들을 써야 하는 자신이 싫고 힘들어서 퇴사했을까?'
갑자기 이유가 궁금해졌다.
'버스 안에서는 왜 내게 그런 말을 했을까.'
시집을 건네주고 아무 말도 하지 않던 그가 얼마 후 퇴사를 할 때는 몇 발자국 뒤에서 가볍게 간다는 몸짓을 했었다.
그가 내 마음속에서 부활했다.
이름이라도 기억나면 좋으련만 처음으로 그에게 인사를 한다.
어딘가에서 행복하게 잘 살고 계시기를 화살기도를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