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J, P)가 사는 방법

"이너피스(inner peace)" !

by 윈서



한때는 혈액형 질문이 모임에서 클레셰가 되었던 시기가 있었는데 요즘에는 MBTI가 그 자리를 대체하는 것 같다. 어느 날 모 TV 예능 프로그램에서 출연자들이 유형들을 왁자지껄 얘기하는 모습을 보면서 '유행인가' 싶어 인터넷에서 무료로 제공하는 테스트 찾아 몇 번 해 보았다.

SNS로 가족과 친구들에게 [당신]들은 어떤 유형인지 물어보니 본인들 전화번호 알려주듯 너무 자연스럽게 알려주었다. 아, 내가 마지막이구나. 지금까지 나한테 어떤 유형인지 물어보는 인간들이 아무도 없었다는 것에 잠깐 서운했다가 물어봤는데 흘려들었던 생각이 났다. 사주, 별자리, 혈액형, 타로카드... 그게 뭐든 인간을 탐구한다는 도구들은 도구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이용하는 사이비들이 문제다. 아침 조간신문에 4컷 만화 보듯 웃고 마는 정도는 괜찮은데 좀 배웠다고 남의 인생을 꿰듯이 툭툭 던지는 말투는 무책임하고 그 소리조차 귀에 거슬렸다. 그래서 그랬을 거다 내가 흘려들었던 이유!


MBTI는 마이어스(Myers)와 브릭스(Briggs)가 칼 융의 심리 유형론을 정형화해서 만든 것인데 학창 시절 심리학이나 인간 발달단계를 배울 때 열심히 외웠던 이론들 중 하나다. 한국 사람들이 유독 좋아했던 혈액형별 성격은 A, B, O, AB 4가지 유형이지만 MBTI는 16가지니까 정교한 방법이긴 하다.

물론 상대적으로 정교하다는 것이지 절대적인 것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사실 우리나라에서는 외향적인 사람들을 여러 면에서 선호하는 편이라 내향적인 나는 I(intraverted)가 싫어서 그 뒤에 따라오는 나머지 특성에는 관심도 갖지 않았었다. 그랬는데, 확실히 요즘에는 개성을 중시하고 다양한 것들에 관대해졌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그것 자체가 또 다른 '획일성'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어쨌든 패널들이 자신이 "I"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말하고 자세한 특징까지 덧붙이는 것을 보니 속에서 [용기] 같은 것이 슬그머니 올라왔다.


테스트 결과는 '주로' INFJ였다. 간혹 INFP가 나오는 경우도 있는데 P와 J의 차이는 생활양식에 대한 선호도를 판단(Judging)과 인식(Perceiving)으로 분류한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INF까지는 못을 박아놓은 것처럼 고정되었고 상황을 인식하는 방법이 때로는 Judging 이기도 하고 Perceiving이기도 한 사람인 것이다. 결과를 보고 처음 드는 내 생각은 "오, 나는 제법 유통성이 있는 사람인데, 옵션이 있잖아?"

- 나도 처음 이론을 배울 때 보다 많이 사회화(?) 되었는지 발랄하게 받아들여졌다. -였다.


예를 들어, 친구를 만나 영화를 보고 저녁을 먹기로 했다고 가정하자. 어떤 영화를 볼 것인지는 사전에 같이 결정하지만 저녁 메뉴는 전적으로 친구 의견에 따른다. 영화를 보고 생각하자고 하면 그렇게 하고, 친구가 미리 "김치찜을 먹고 싶어"라고 말한다면 "영화관 근처 000 집이 맛있다고 하던데." 정도의 의견만 제시한다. 어제 먹었던 메뉴와 똑같아 상관없다.

그러나 친구가 "네가 결정해!"라고 한다면? 기꺼이 가이드가 돼서 영화의 내용, 이번 주 친구와 내가 먹은 음식 종류 등을 비교해 가며 메뉴를 찾아낸다. 이때는 J(Judging)이 되는 것이다.


오호, 이 얼마나 평화롭고 유연하고 착한 해결방법인가. 솔직한 내 마음은, 상대에 따라 달라지는 상황에 감정을 소모하고 이끌리고 싶지 않다는 일종의 "자기 방어"인 셈인데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긍정적인 사람으로 보이는 모양이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나는 세상에 드러나지 않는다. 평소에는 보일 듯 보이지 않는 듯 그런 취급을 받기도 하니까.


그런데 갑자기 상황이 180도 바뀔 때가 있다. 별다른 이상 징후를 보이지 않았는데 갑자기 손절당했다고 불만을 표시하거나 나를 이상하고 종잡을 수 없는 사람으로 생각하도록 내버려 두는 경우가 있다. - 주관적인 관점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그렇지 않다. 당신의 깊은 내면을 헤집고 들어가 보면 분명 결정의 순간에 나를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에 동의할 것이다. - INFJ, INFP 들도 물론 이런 경우가 있다. 그러나 상대가 [자기]를 무시했다고 하면 바로 진심으로 사과하는데 그 점이 다른 성향들과 차이가 있다. 왜냐하면 의도를 떠나 상대가 화났다면 먼저 사과하는 것이 원칙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시 상황으로 돌아가서, 상대가 김치찌개를 먹고 싶다고 했는데 갑자기 짬뽕으로 메뉴를 변경한다거나 영화를 본 후 생각해 보자고 해놓고 뜬금없이 다른 친구를 불러내는 경우다. 그나마 나에게 의견을 물어보면 다행인데 "쟤는 다 맞추는 사람이니까."라며 마음대로 결정해 버리는 사람들이 있다.

이럴 때는 그냥 머릿속이 하얗게 돼서 멈칫하다가 어색하게 시간을 보내고 연락을 끊는다. 변명을 해보자면 바로 손절하는 것은 아니다. 삼 세 번이 있지 않은가. 참고, 참고, 참다가 지워버린다. 어떤 경우는 몇 년을 참아주는 사람도 있는데 이것을 두고 손절라인이 가장 뒤에 있는 유형이기 때문이라고 진단하는 사람도 있다. 오랫동안 참았기 때문에 후회는 없다. 신기하게 잊겠다고 하면 별다른 후회 없이 잊힌다. 상대에게 그러지 말라고 말하면 되지 않느냐 불평할 것이다. 의사표현은 했다, 대개는 상대가 흘려듣고, 내 표정을 잃지 않고, 반복하고, 아무튼 INPJ의 머릿속은 늘 생각 중이니까 즉흥적이라는 비난은 맞지 않는다.




인간관계 말고 힘들게 상대하는 것이 있는데 "소음"이다. 우리의 언어는 대부분 중의적어서 사람마다 한 단어가 담고 있는 의미의 스펙트럼이 다르다. 내 경우 "소음"은 SOUND만이 아니라 장면(SCEANE), 소문(HUMOR) 그리고 장소(PLACE)도 포함된다. 그러니까 일단 거슬린다고 생각하면 무조건 "소음"이다.


밤에 침대에 누워있는데 거실 쪽에서 TV 소리가 작게 들리거나, 회사에서 일을 잘하고 있다가도 갑자기 앞사람의 속닥이는 통화 소리가 거슬리기 시작하면 예민해지고, 횡단보도를 건너는 중에 뒤에서 또각또각 구두 굽 소리가 나면 나도 모르게 귀를 막아 버린다. 예고 없이 몰아치는 비는 차라리 괜찮다. 뒤에서 다가오는 자전거 벨 소리는 차라리 가까운 상가 건물 어닝 아래로 피했다가 그 자전거가 사라진 후에 움직이는 편이 낫다. 드라마 속 우영우 변호사가 거실 시계 초침 소리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장면을 보고 나를 돌아봤을 정도니 꽤나 예민한 사람인 모양이다. 그러나 장담하건대 일상생활 속에서 내가 그런 류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없다. 심지어 내 가족 조차도!


이것을 해결하는 방법은 조용히 "거리두기"를 하는 것이다. 걷다가 생기는 문제는 뒤로 몇 걸음, 앞으로 몇 걸음 움직여서 그 장소나 장면에서 멀어지고, 집에서는 방으로 들어가 귀마개를 하고, 직장에서는 화장실이나 휴게실에서 커피를 마신다. 물론 충분한 시간이 있으면 좋겠지만 일단 "거리두기"를 한다는 생각만 해도 단 몇 초만에 견딜만해지기도 하는데 이럴 때는 잘 훈련된 [침 흘리는 개] 같기도 하다.


가족들과 단체로 여행을 가면 현지 옵션투어에서 스스로 빠지는 방법으로 지친 신심을 회복하고 -사실 많이 기다려지는 시간이기도 하다.- 여러 명이 걸을 때에는 가능하면 양쪽 끝에 서서 언제든지 떨어질 수 있도록 배려한다. 내가 중심이 되어 대화를 이끌고 신나게 떠들다가도 그 장소에서 벗어나면 입을 닫고 오랜 시간 말을 하지 않기도 한다.




꿈이 하나 있다. 지치고 힘들 때 찾아갈 수 있는 아무도 모르는 방 하나를 갖는 것이다. 덩그러니 빈 방에 커다란 목욕통을 배치하고 그 안에 푹신한 인조털을 두껍게 깔아 놓는다. 사람이 들어가 누워 있으면 바깥에서 보이지 않을 만큼 커서 안정감을 주어서 혼자 있고 싶을 때 들어가면 깊숙이 침전할 수 있을 것이다. 상상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다. 마치 내가 자외선 소독기 안에 넣어진 그릇들처럼 안전한 장소에 놓이는 기분이다. 어쩌면 엄마의 뱃속 같을지도 모르겠다.


오랜 내 꿈은 반드시 이뤄 낼 생각이다. 혹시 누군가에게 들키거나 보여줘야 할 때가 온다 해도 일단 [별종] 소리를 들으면 그만이고 시간이 모여 역사가 되면 그들의 카테고리 안에 들어갈 테니까.

이제 나는 단단해졌고 세상에 별종이 많은 것 같아 외롭지 않다. 내가 그때 그렇게 했던 행동은 이런 사람이었기 때문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를 찾았다. 시간은 인간 탐구를 시도한다는 별자리, 사주 등을 포함한 MBTI도 아무렇지 않게 만든다.

누가 나를 탐구해? 탐구해!


어쩌면, 코로나 때문에 이미 INF(J, P)의 시대가 와 있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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