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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명선 Dec 20. 2016

간디가 잠든 도시, 델리

비폭력 불복종 운동을 이끈 '간디' 이야기

마하트마 간디가 인도의 민중의 대통령으로 불리던 시절, 영국의 여왕 엘리자베스는 아무 직책도 없었던 간디를 결국 영국으로 초대하게 된다. 대중들의 눈치 때문에 어떤 방식으로든 대화가 필요했다. 제국으로 발길을 옮긴 간디는 그럼에도 당당했다. 늘 그렇듯이 흰 면직물을 조각조각 기워만든 도티를 입었고, 정강이는 훤히 드러냈다.


영국에 반대하다 감옥살이를 하면서 물레를 돌려 만들었다던 그 옷은 엘리자베스 여왕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을지 몰라도 영국 기자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드레스코드에 대한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왕이 내 몫까지 입지 않았나요?" 200년 동안 영국령으로 있으면서 인도가 헐벗게 된 것을 꼬집는 말이었다. 


소박한 모습의 마하트마 간디.


간디가 영면한 자리.


아그라를 떠나 조드푸르로 바로 가지 않고, 델리를 찾은 부끄럽게도 간디 때문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간디의 화장터와 간디 박물관에 들를 생각도 없었다. 시티은행 ATM도 들를 겸, 네팔에서의 인연을 다시 만날 겸 들른 곳이기에 당시 간디의 흔적에서 큰 감동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조드푸르에서 뒤늦게 읽게 된 이옥순 교수의 <인도는 힘이 세다>를 보면서 간디를 되짚어본다. 단순히 비폭력 운동가 정도로만 알고 있었지만, 그가 벌인 일련의 일들은 가히 혁명적이었다. 인도 간디 박물관에는 유독 물레를 돌리는 사진과 소금과 관련된 사진이 많았었는데 그 이유를 이제야 적어 본다.  


간디의 소금행진 모습.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간디의 소금 행진이다. 인도는 우리나라처럼 삼면이 바다지만, 영국령인 시절 인도는 소금의 생산과 판매를 통제하고 과도한 세금을 먹였다. 특히 여름이면 40도를 치솟는 인도 대부분의 지역에서 소금은 필수인데 당시 염전 사업은 영국 국왕의 전매사업이었다.


이에 반발한 간디는 수 십 명의 동지들과 함께 구자라트주까지 걸어갔고, 그곳에서 주전자에 바닷물을 끓여 소금을 움켜쥐었다. 이 일로 간디는 옥살이를 하게 되는데 그 뒤 6만 명의 인도인들이 같은 방법으로 옥살이를 자처했다고 기록돼있다. 영국은 주전자에 바닷물을 끓였다는 하찮은 이유에 무력을 들이댔고 결국 전 세계인에게 손가락질을 받았다.


인도 화페 루피에는 모두 간디의 초상화가 담겨있다.


인도에게 독립운동은 그렇게 거창한 게 아니었을지 모른다. 물레를 돌려 옷을 만들어 영국의 방직산업을 거부하고, 폭력에 저항하지 않고 고통을 조금 감내하면 그만이었다. 물론 그 불편함의 정도는 정확히 가늠이 안되지만, 그 작은 불편함들은 결국 억압에 균열을 냈다. 어쩌면 거친 무력보다, 조용하지만 단단히 연대된 저항이 더 강할지도. 마지막으로 간디가 남긴 말을 덧붙인다.


나는 폭력을 반대한다.
왜냐하면 폭력이 선을 행한 듯 보일 때,
그 선은 일시적일 뿐이고,
그것이 행하는 악은 영원하기 때문이다.


델리에서 만난 인도 아이들.

이 글은 2014년 12월에 작성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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