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호수 Oct 22. 2021

엄마의 집







 

 우리 집에는 몇 가지 규칙이 있다. 아니, 규칙이라기에는 너무 딱딱하고 꼭 지켜야 할 약속이라고 하는 게 맞는 것 같다. 아주 사소하지만 예민한 문제다. 첫 번째, 화장실 불을 끄지 말 것. 두 번째, 볼일을 보고 나면 변기 뚜껑은 꼭 닫을 것, 세 번째, 밤에 잘 때도 거실에 전등 하나는 켜 둘 것. 이 모든 약속은 사실 조금은 일방적인 부분이 없지 않아 있다. 가족이 같이 정한 것이 아니라 엄마가 우리에게 부탁한 것이었으니까. 사실 전혀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주 무신경하게 지나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저 몇 가지 약속이 정해진 뒤로 나와 남동생이 저 내용을 지키지 않으면 엄마에게 가벼운 잔소리를 듣게 됐다.


 화장실 불을 끄지 않게 된 건 지금 살고 있는 집으로 이사를 오고 나서부터 시작됐다. 엄마는 새로 이사 온 집을 좋아했다. 전에 살던 집보다 훨씬 넓고, 깨끗하고, 무엇보다 내가 조금 무리를 해서 집안에 있는 가구를 새로 다 들였기 때문이었다. 엄마는 전에 살던 집에서도 늘 집을 예쁘게 꾸미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이사 온 집에서 그 마음을 착실하게 수행했다. 그런 엄마가 딱 한 가지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것은 화장실이었다. 낮인데도 불을 끄면 너무 어둡다는 게 이유였다. 엄마는 어두운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라 밤에 잘 때도 곁에 작은 불빛을 두고 자는 편이었다. 어두운 화장실을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 엄마는 우리에게 항상 화장실 불을 켜 두라고 했다. 나는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냐고 물었지만 엄마는 제법 그럴듯한 이유를 댔다. 우선 화장실이 너무 어두워서 문을 열었을 때 기분이 좋지 않고, 집안에 이렇게 어두운 공간이 있으면 복이 들어오지 않는다는 게 이유였다.


 사실 엄마가 정한 약속들은 모두 다 똑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건 '복'이었다. 화장실 불을 켜 둠으로써 집안에 어두운 곳이 없게 해 복이 들어오게 하고, 변기 뚜껑을 열어 놓으면 재물운이 날아가니 꼭 닫아 두어야 하고, 밤에 잘 때도 어두운 거실에 밝은 불빛을 두면 집안이 따뜻해진다는 이유에서였다. 모든 이유는 복을 받기 위해서였다. 몇 번 엄마에게 대놓고 불편함을 이야기한 적도 있었다. 그런 건 미신일 뿐이고 아무런 소용도 없다고. 엄마가 너무 거기에 신경을 쓰니까 사소하게 신경이 쓰일 때가 많다고 하면서. 남동생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러나 엄마는 그렇게 해야 한다고만 말했다. 그래야 엄마 마음이 편하다고. 그건 어쩌면 일종의 강박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엄마도 어느 정도 그 점을 인정했고.


 아마 조금씩 안정되고 있는 삶을 놓치고 싶지 않아 엄마 나름대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어쩔 수 없이 화장실 불도 켜고 나오고, 볼일을 본 후 변기 뚜껑도 꼭 닫는다. 거기다 내 방 문은 흐릿한 유리로 되어있는데, 거실에 켜 둔 스탠드 불빛 때문에 한동안은 잠을 설치기도 했다. 엄마는 본인이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집을 자신에게 가장 알맞게 바꾸려 노력하고 있는 중이었다.


 나도 물론 엄마의 행복을 바라고 있지만 사실 그런 것들을 보고 있을 때면 의구심이 생길 수밖에 없다. 저런 것들로 복을 받을 수 있다면 애초에 우리가 그렇게 불행하지 않았어도 되는 것 아닌가 싶었다. 그러니까 엄마가 하는 행동이 나에게는 조금 터무니없게 느껴진다는 말이다. 그러나 나는 더 이상 엄마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다. 저런 사소한 행동들이 엄마에게는 어쩌면 유일하게 내일의 행복을 보장해줄 수 있는 어떤 부적과도 같을 수 있으니까. 사람은 살면서 누구나 자신만의 부적을 갖고 있지 않는가. 엄마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인 집에 그런 애착을 쏟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면 어느 정도 이해는 할 수 있다.


 엄마는 최근에 현관문에다가 풍경을 달았다. 들어왔다 나갔다 할 때 맑은 소리가 나는. 갑자기 웬 풍경이냐 물었더니 문을 열고 나갈 때 좋은 소리가 나면 복이 들어온다는 게 이유였다. 그놈의 복. 엄마가 달아놓은 풍경의 맞은편에는 재물운을 불러준다는 해바라기 그림이 그려진 패브릭 포스터도 걸려 있다. 이 집은 엄마에게 있어 하나의 커다란 복주머니인 셈이다. 엄마에게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는 않지만 나는 엄마의 그런 행동이 아주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다. 현실적으로 보자면 그런 것은 아무것도 쓸모가 없고 복을 받으려면 결국 오늘의 내가 내일의 나를 위해 무언가 해야 하고, 뛰어야 하는 게 맞다. 풍경 소리 하나에 복이 굴러들어 올 거라 생각하는 건 요즘 사람인 내 입장에서는 당혹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그만큼 집을 지키고 싶어 하는 엄마의 마음을 생각하면 또 애틋해지기도 한다. 엄마는 엄마의 자리에서 엄마가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우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니까. 이미 어른이 되어버린 우리에게 엄마가 해줄 수 있는 건 엄마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에서 우리의 '복'을 빌어주는 것뿐이다. 나는 그게 못내 씁쓸했다. 고마운 마음보다도 엄마가 그런 사소한 의미들에 힘들어할까 걱정스러웠다. 엄마는 그런 것들을 사고, 꾸밀 때 행복을 느끼지만 나는 엄마가 스스로 느낄 수 있는 행복의 공간이 조금 더 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엄마가 가질 수 있는 세상이 조금 더 넓었더라면. 엄마는 지금 자신의 모습에 충분히 만족한다고 해도 엄마보다는 그나마 넓은 세상을 봤고 여러 가지 경험을 한 딸의 시선으로 봤을 때 나는 엄마의 꿈이, 엄마의 복이 집이라는 공간에만 한정되어 있는 게 더없이 쓸쓸하게 느껴진다.


 그렇지만 나는 엄마가 불쌍해 죽겠다거나, 엄마가 안쓰럽다거나, 엄마를 안타깝게 보는 건 절대 아니다. 그럴 생각도, 그럴 자격도 없다. 지금 엄마의 모습도 과거의 엄마가 살아온 방식이 쌓여서 만들어진 것일 테니, 한 사람의 인생을 내 마음대로 평가할 수는 없는 거다. 엄마가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든지 간에. 다만 엄마가 조금 더 편안한 방식으로 행복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있다. 모든 것은 엄마의 선택이겠지만.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중에도 거실 구석에 전등 하나가 켜져 있다. 그 불빛 덕에 내 방은 어둡지 않다. 나는 매일 아침 엄마가 현관문을 열고 고양이 밥을 주러 나갈 때마다 잠에서 깬다. 위에 달린 그 맑은 풍경 소리에. 그리고 나면 침대에서 일어나 불이 켜져 있는 화장실에 가서 볼일을 보고 물을 내리고 변기 뚜껑을 닫고 나온다. 내가 사랑하는 엄마의 집, 엄마의 집이다.


 엄마의 집에서 나는 최대한 엄마가 바라는 만큼 행복하게 지낼 수 있기를 소망한다. 지금보다 잠을 더 잘 잘 수 있기를, 울지 않기를, 괴롭지 않기를. 그런 사소한 약속들이 엄마에게만큼은 유의미한 것이기를 바라본다. 하나의 배신 없이, 아주 오래도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