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 나의 영역을 만든다는 건 많은 시간이 필요한 일이다. 나는 나만의 공간을 찾는 데 신경을 몰두하곤 했다. 그중 하나가 '여기에 무언가가 있다고?' 하는 생각이 들게끔 하는 카페와 식당을 찾아내는 일이었다.
학교 앞에 있던 지하 술집부터, 여행을 떠나는 이를 환영한다는 '출국'이라는 이름의 카페까지. 내가 좋아하는 장소를 찾는 재미에 푹 빠져 있던 시기였다.
나는 하나에 꽂히면 하나만 파는 사람이라, 내가 좋아하는 장소를 꾸민 이들과 대화하는 걸 즐겼다. 그러나 늘 어느 한 부분에서 공간을 침범당한 느낌이 들 때면 그곳을 방관하곤 했는데, 그래서일까 너무 짙은 관계성이 없던 흑석동이 너무도 좋았다.
대학 시절에 나는 불안과 우울을 품고 살았다. 유독 감정이 나를 잠식한 날이면 냉장고에 숨겨둔 와인을 꺼내 내 속을 빨간색으로 가득 채웠다.
그래서일까, 나는 유난히도 빨간 입술에 먹색 단발이 잘 어울렸던 '아멜리에'를 사랑했고, 온갖 색이 난무하던 '무드 인디고' 속 콜랭의 우울한 블루를 마음속에 품었다.
피지 않던 담배를 들고 와인을 마시며 글을 쓸 때면 내가 이 시대를 장식하는 마지막 예술가가 된 듯한 착각에 빠지던 시절. 빨간 벽에 쭈그려 앉아 이별 노래를 들으면 자연스럽게 눈물이 터트리고 무색에서 색을 가득 품은 심장으로, 색이 가득한 공간에서 무색으로 가득 채웠던 공간.
그곳이 나의 자취방이자, 유독 빨간 벽돌 벽에 빨간 장독대가 아이러니한 곳이었다.
5년 동안 둥지를 틀었던 흑석동을 떠나는 날, 나의 자취방은 리모델링이 되어 신식 건물이 되었는데 다시 찾은 그곳만큼 정 없는 공간은 없을 듯하다.
빨간 와인이 좋아 빨간색을 찾아다니던 시기, 나는 아직도 색을 가득 품었던 흑석동이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