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내리는 날에는 예가체프가 잘 어울린다 말한 이가 있었습니다. 흑석동의 작은 거리에 커피 원두의 향과 짙은 녹음이 물드는 시간, 그 시간에 내려마신 예가체프가 가장 진하다 말했죠. 저는 그이가 말하는 커피의 맛을 몰라 비가 내린 뒤의 축축하게 느껴지는 흙내음은 아닐까 고민하곤 했답니다. 물방울을 품은 은방울꽃까지 생각나는 재료를 하나씩 흩뿌리면 비가 그치곤 했죠.
어제도 비가 내렸다고 합니다. 요즘 저는 집 밖을 나갈 일이 별로 없어 하루종일 내렸다는 비도 맞지 않았죠. 장마철에는 장화 안까지 물이 꽉 차곤 했는데 지금은 땀만 가득 차고 있습니다. 다를 게 있다면 물에 젖어 축축해진 바닥의 상태랄까요. 습합니다. 날씨가 덥고, 비가 내린 후에 온도는 사우나에 있을 때보다 조금 더 불쾌한 느낌이 들어요. 레드와인을 한 잔 마셨고 몸 상태가 안 좋은 탓인지, 날씨가 습한 탓인지 머리가 아파왔습니다. 이게 취기라면 취기일까요. 울렁임이 올라왔습니다. 단 맛의 초콜릿도 생각났죠. 그래서, 커피를 마셨습니다, 그가 내려준 예가체프가 생각났거든요. 물론 정반대의 맛이었지만 아무렴 어떻습니까. 산미라곤 없는 것이 나이 든 제 모습을 형상하는 듯합니다. 고소하고 묵직한 바디감의 원두. 약간의 코코넛 오일이 섞여있는지도 몰라요.
스트레스가 조금 있었는지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습니다. 어제까지는 한숨이 가장 큰 감정표현이라 말한 것 같은데 전 아직도 저를 모르는 것 같네요. "서운해"라는 말을 뱉었지만, 그 말은 나에게 하는 말이었어요. 조금은 쉬었으면 하지만 쉬지 않는 나에 대한 질투, 질타였을 테죠. 한마디 말에 본인이 어떻게 해주길 바라냐는 말이 나올 줄은 몰랐지만, 눈물이 나왔어요. 티 내기 싫어 전화를 끊고 애써 눈물을 참았지만 참아지지 않았죠. 한 번 흐른 눈물은 또 한 번, 또 한 번 그렇게 저녁을 꽉 채웠습니다. 어제도 비가 내렸다고 하죠, 제 방은 오늘 뒤늦은 장마가 온 듯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