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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elvin Mar 10. 2024

뚜벅뚜벅

한 발짝 한 발짝, 발걸음의 묘미

나는 몸 쓰는 일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헬스장을 일주일에 두 번 정도 다니긴 하지만 대학생 때 허리부상 이후 2주 이상 신체활동다운 신체활동을 하지 않으면 허리가 다시 아파오기 시작해 어찌 보면 살려고 시작했던 것이지 운동 자체가 좋아서 시작한 건 아니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집돌이가 되고 친구들이 먼저 보자고 부르지 않는 이상 평소에 내게 어디냐고 묻는다면 내 대답은 십중팔구 집이다.


이런 내가 참으로 역설적이게도 좋아하는 신체활동(?)이 있다. 바로 걷기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걷기는 중년 남성분들의 등산이나 썬캡을 푹 눌러쓰신 아주머님들의 파워워킹과는 조금 다르다. 어느 정도 규모가 있던 내 대학교 캠퍼스 안을 셔틀을 타지 않고 돌아다닌다던지, 버스나 지하철 한두 정거장 거리는 대중교통을 타지 않고 걸어 다닌다던지, 혹은 기분이 조금 꿀꿀할 때 집 근처 작은 공원을 산책한다던지 하는 그런 것을 말한 것이다.


처음 본격적으로 걸어 다니는 것을 즐기기 시작한 것은 프랑스에서 살 때인 것 같다. 프랑스에서 초등학교를 다닐 때 버스와 지하철을 갈아타며 30분 남짓한 등교를 해야 했고 그때 처음으로 등하굣길에 휴대폰에 유선이어폰을 귀에 꽂고 노래를 들으며 지루함을 날려 보냈었다. 그리고 프랑스에 살면서 가족여행을 많이 다니면서 걸어 다니는 시간이 늘어났고 그 시간 속에서 가족들 간의 사랑이 두터워지고 새롭고 신기한 주변환경을 관찰하던 것이 시작이지 않았나 생각한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등하굣길이 걸어서 20분 정도 걸어야 하는 거리였고, 매일 다녔던 학원 역시 집에서 걸어서 15분 정도 걸리는 거리였다. 물론 시간 자체만 보면 긴 거리는 아니다. 하지만 학교, 학원 모두 우리 집 앞과 학교, 학원 바로 앞에 정차하는 버스정류장이 있었지만 매번 음악을 들으며 걸어 다녔고 버스를 탔던 기억은 손에 꼽는다. 가끔 친구들과 놀다가도 몇몇 친구들이 귀찮다, 피곤하다 하며 대중교통을 탈 것을 권할 때 나 홀로 거기 금방인데 걸어가자라는 말을 했던 것 같다. 물론 대부분 다수결의 의견에 의해 대중교통을 탄 적이 훨씬 많았지만.


이렇게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걸어 다니는 행위 자체를 좋아했던 것 같다. 그리고 걸어 다니면서 할 수 있는 것들은 생각해 보면 꽤 많다. 위에서 하나를 언급했듯이 음악을 들으면서 거리를 거닐 수 있고 이것이 내 스트레스 해소 방법 중 하나이다. 취미로 피아노를 열심히 쳤던 대학생 때 나는 음대 건물에 피아노만 덩그러니 놓여있는 여러 개의 방음부스 중 하나에 들어가 1시간 동안 피아노를 치고 오는 것을 참 좋아했었다. 내 자취방과 음대까지의 거리는 걸어서 30분. 보통 하루 일과가 모두 끝나고 취미생활을 했었기에 피아노 좀 치러 가볼까 하는 시간은 항상 늦은 저녁이나 밤이었고, 그 시간대엔 셔틀도 지나다니지 않았다. 이 어둑어둑한 시간에 그 30분, 왕복 한 시간을 이어폰을 꽂고 한적하고 시원한 캠퍼스의 밤공기를 마시며 거니는 그 시간이 나는 정말 좋았다.


또 여행할 때 많이 걸어 다니게 된다. 중학교 친구들끼리 한 달 동안 유럽여행을 갔었을 때 그 어느 때보다 많이 걸었을 거라 단언한다. 그렇게 걸어 다니는 동안 다리는 좀 아팠지만 덕분에 친구들과 그동안 못했던 이야기들, 수많은 사진들, 그리고 추억들을 그 모든 발걸음 속에 담아왔다. 유럽에서는 새로운 추억과 경험들을 발걸음에 담아왔다면 미국에서 고향 한국땅을 밟아 발걸음을 옮길 때에는 어렸을 때 찍어두었던 발자취를 따라가며 그 속에 담겨있던 추억을 꺼내보곤 한다. 중학교 등굣길을 다시 걸어보며 "여긴 문방구가 있었는데 이젠 토스트 집이 새로 들어왔네", "이 낡은 철창은 안 바꾸고 아직도 그대로네" 하며 기억 속을 걷는 느낌은 퍽 좋다.


작년 봄, 거의 4년 만에 방문했던 한국에서 중학교 졸업 후 보지 못했던 거진 9년 만인 친구들을 몇 만났었다. 오랜만에 밥 한 끼 하며 그동안의 근황을 묻는 좋은 시간을 가졌지만, 가장 뜻깊은 대화를 나눴던 건 같이 길거리를 오가며 청계천, 중랑천을 따라 걸으면서였다. 고민거리, 꿈, 가치관 등 간단한 근황보다 뜻깊은 속 얘기를 하고 9년이란 시간 동안 많은 경험을 쌓아 빚어진 지금의 내 친구의 모습에 대해 들어보고 더 성장한 내 모습도 공유할 수 있던 건 함께 발걸음을 따라 맞추며 걷던 그 시간이었다.


이런 복합적인 이유들로 난 걷는 것을 좋아한다. 이곳 미국에서는 땅덩이도 크고 인프라 자체가 차가 없으면 이동이 불가능하게 설계되어 있어 (뉴욕 같은 밀집된 대도시 제외) 걸어 다닐 수 있는 곳이 거의 없다. 그래서인지 걸을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되도록이면 잡는 것 같다. 음악을 들으며 걸을 때 나만의 세계에 들어가 즐기고 나오게 해주는 힘이 있고, 옛 친구나 연인끼리 시원한 산들바람이 부는 거리를 거닐며 대화할 때 나도 모르게 속마음이 덜컥 나오게 되는 신비한 힘 역시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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