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팅 팟 미국, 내 주변엔 물음표
미국에서 해외친구 만들기는 과연 쉬울까?
Melting pot: (많은 사람·사상 등을 함께 뒤섞는) 용광로, 도가니. 출처: 네이버 영어사전
한국인들이 한국을 지칭하는 별명들이 무엇이 있을까? 나는 붉은 악마, 호랑이의 나라, 배달의 민족 정도가 생각난다. 비슷하게 미국인들은 본인들의 나라를 Land of American dream (요새는 그닥 잘 쓰이지 않는다, 미국도 워낙 흉흉해져서..) 그리고 melting pot이 있다. 미국이란 나라 자체가 영국인들이 넘어와 정착해서 만든 나라이고 많은 타국의 이민자들을 받아 성장한 나라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 사상, 종교, 문화가 섞여있는 나라이다. 미국인들도 그걸 인지하고 있고, 그래서 본인들의 나라를 소위 용광로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래서 자연스레 일상생활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볼 수 있다.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은 당연히 인종이다. 대학교 캠퍼스 안을 걷다 보면 백인, 흑인, 아시아인, 히스패닉 계열의 사람들을 모두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그렇기에 당연히 모두들 다른 배경에서 각기 다른 경험을 한 사람들과 만나고 같이 조별과제를 하며 후에 직장에선 같이 일을 한다. 그렇다면 미국생활 8년이 넘어가는 내 주변엔 다양한 친구들이 있을까?
질문에 먼저 답하자면, "아니"다. 조금 풀어서 대답하자면, 현재로선, 내 주변에 다양한 "배경과 경험"을 가지고 있는 친구들은 많지만, 다양한 "인종"의 친구들은 없다.
고등학생 때는 사실 다양한 인종의 친구들이 많았다. 미국 고등학교는 한국처럼 학생들이 앉아있고 선생님들이 왔다 갔다 하는 형식이 아닌 선생들이 각각의 방이 있고 그 수업을 듣기 위해 학생들이 움직인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매 수업마다 다른 학생들을 만나게 되고, 매 수업마다 다른 아이들과 팀플을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타인종 친구들을 사귀게 된다. 생각해 보면 난 고등학생땐 한국 친구들은 손에 꼽았고 대부분 외국 친구들이었다. 방과 후에도 외국 친구들과 연락하며 따로 만나고 미드에나 나오던 house party도 가서 신나게 놀던 내가 생생하게 기억난다. 그런데 대학교를 졸업한 난 지금 이탈리아계 백인 친구 한 명, 히스패닉계 친구 한 명을 제외하곤 모두 한국 유학생, 한국 1.5, 2세 친구들 뿐이다.
왜 이렇게 됐을까 나름대로 생각해 보고 내린 결론은 결국 "나"라는 사람이 제일 편안하게 지낼 수 있는 곳은 주변에 한국인들이 많은, 적어도 한국의 기운이 조금이라도 나는 곳이라는 것이다.
고등학교 때는 부모님과 함께 한국말을 하고 한식을 먹으며 지냈고, 한국 친구도 아예 없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외국친구들, 문화와 원 없이 부딪혀도 돌아와 편히 지낼 수 있는 곳이 있었다. 미국에 얼마 오지 않은 10대 소년의 미국에 대한 호기심이 컸던 나이였던 것도 감안할 수 있겠다. 그리고 무엇보다 미국은 미국 수능 SAT를 제외하면 한국에서처럼 새벽 1-2시까지 책상에 앉아 공부하는 문화가 아니고 (SAT도 몇 년 동안 새벽까지 공부할 만큼 어렵지도 않고) 이것저것 몸으로 많은 것들을 경험해 보라는 취지의 교육을 많이 한다. 쉽게 말해 속 편하다.
하지만 대학교는 다르다. 땅덩이가 넓은 탓에 대부분의 학생들이 기숙사나 근처 자취방을 구해 부모의 지붕아래에서 나와 살고 무엇보다 진로를 찾아가는 모든 선택과 행동에 자기 자신이 모두 책임을 져야 하는 상황이다. 그러다 보니 공부량이 배로 늘고 사회생활의 강도도 높아지며 그에 따른 스트레스 강도도 올라간다. 이러한 대학생활중에 나는 편안함이라는 것을 너무나도 찾고 싶었고 내게 편안함을 주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기도 전에 난 이미 한인 커뮤니티를 찾아가고 있었다. 이런 상태로 대학생활 중후반을 보내다 보니 마음이 맞는 친구들은 자연스레 한국인 혹은 한인 2세들이 다수를 이루게 되었고 진정한 외국인 친구들은 손에 꼽을 정도로만 남게 되었다.
위에서 나는 다양한 배경과 경험을 가지고 있는 친구들은 많지만, 다양한 인종의 친구들은 없다고 했다. 다양한 배경과 경험은 당연히 타인종의 사람들에게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같은 인종의 사람들에게서도, 심지어 같은 한국인이나 한인 2세들에게서도 내가 알고 있던 배경과 문화와는 다른 경험을 해 본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다. 여러 나라에서 살아본 경험, 각자 다른 가정환경, 미와 성공의 기준 등 수 없이 많다. 그리고 이런 다양성에서 오는 배움의 즐거움도 이루 말할 수 없다. 이렇게 셀 수 없는 사상, 종교, 문화가 섞여있는 나라이기 때문에 미국 사회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요소 중 하나가 다양성이 아닐 수 없다.
그렇지만 다양성과는 반대되는, 하지만 우리가 인간관계를 형성하는데 중요한 면모 중 하나가 바로 "동질감"이다. 비슷한 과거의 경험, 비슷한 관심사, 공감이 되는 옛날 얘깃거리들은 사람들을 하나로 모아주는 힘이 있다. 특히나 타지생활을 할 때에는 더욱 그런 것 같다. 다양성에서 오는 새로운 것을 접하는 즐거움과는 다른 느낌이다. 이런 동질감은 나는 개인적으로 외국인들에게서는 같은 직종에서 일을 하거나 비슷한 분야로 공부/준비하고 있지 않는 이상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한국인들에게서는 저런 전제조건이 없어도 어떻게 미국에 오게 되셨어요라는 질문으로만 시작해도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던 것이다. 나는 마음이 맞는 오래가는 친구를 만들 땐 새로움에서 시작한 사람들보다 익숙함에서 시작한 사람들과 더 쉽게 이루어지는 것 같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내 주변에 우리가 소위 생각하는 외국인 친구들이 많이 없게 되고 "동질감"을 느낄 수 있는 한국인 친구들이 많아지지 않았나 생각한다. 외국인 친구들이 없다고 해서 미국에서 살아가는데 큰 지장은 없다. 단지 주류사회에서만 얻을 수 있는 취업에 대한 혹은 각기 조금 귀한 정보들을 얻기 쉽지 않을 뿐.
이전 글에서 짧게 청소년기 때 정체성은 중학교 때 확립이 되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근거는 내 경험뿐만 아니라 4살 터울의 내 동생을 지켜보면서이기도 했다. 동생은 한국에서 미국을 올 때 초6이었고 미국에서 중학교 생활을 시작했다. 그렇기에 당연히 중학교 때 미국 친구들과 미국 문화에 녹아들어 지냈고 한국 친구들과 연락하며 지내기엔 조금 어렸다. 거기에 더해서 질이 좋지 않은 한국 아이들에게 데이는 경험을 하면서 자연스레 한국인들과 거리를 두게 되었고, 현재 대학생인 내 동생은 나와 정 반대로 한국인 친구들은 손에 꼽고 대부분 타인종 외국인 친구들이다.
동생얘기를 꺼낸 이유는 동생이 나와는 정 반대 부류의 친구들을 갖고 있지만 돌아보면 친구를 만들어 가는 것에 있어 기반이 되는 것은 비슷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한국에서 중학교를 나와 한국인이란 정체성을 가지며 한국 문화를 공유하는 한국인들이 편하다는 반면, 내 동생은 미국에서 중학교를 나와 외국인들과 교류하고 미국 문화를 어렸을 때부터 공유한 외국인들이 더 편하다는 점이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나와 내 동생 같지는 않다. 미국에서 태어난 한인 2세가 나보다 이승철, 이선희 노래들을 많이 알던 경우도 봤고, 나랑 비슷한 나이대에 온 한국 친구가 외국인들과 더 잘 지내는 경우들도 봤다. 하지만 사람은 자신이 경험한 것을 토대로 얘기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저 내가 8년 동안 미국에서 살면서 외국 친구들을 만나고 관계를 유지하는 과정에서 든 생각을 적어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