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보면 크고 작은 일들이 정말 많이 일어난다. 그중엔 하루를 기쁘게 혹은 슬프게 하는 자잘한 일들이 있는 반면 어떤 일을 기점으로 전과 후의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는 일들도 존재한다. 나도 대륙을 오가며 지내는 파란만장한 사건들이 인생에서 있었지만 내 기준에서 가장 큰 인생의 전환점은 한국에서 지냈던 중학교 2학년이다.
프랑스에서 4년을 살고 돌아왔던 한국. 한국에선 초등학교 6학년을 마치고 있을 12월이었기에 부모님이 내 중학교 배정에 애를 먹으셨다고 한다. 그렇게 어찌저찌 입학한 중학교 첫 등교날은 참 많이 떨렸고 긴장이 많이 됐었다. 한국에서 초등학교 3학년 중간에 프랑스로 떴던지라 한국 학교 생활이 어땠는지 감은 커녕 기억조차 안 났었기 때문에 내 중1 생활은 내 스스로 한국 적응기라 생각하며 지내자라고 마음먹었었다. 다행히 반 친구들은 대체로 착했고 내게 별명도 지어주며 편하게 지낼 수 있도록 도와줘서 고마웠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여전히 적응기를 거치고 있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었고, 당연히 중1 때는 공부에 큰 뜻이 없었다. 중1 첫 중간고사. 66점이 적힌 국어과목 시험지를 전직 국어교사셨던 엄마께 당당하게 보여드리며 짧은 대화를 나눴다.
"엄마, 엄마! 나 국어 66점 맞음 ㅎㅎㅎㅎ"
"어이구 좋니? 넌 이 점수에 만족해?"
"그럼! 프랑스에서 오자마자 국어에서 이 정도면 엄청 잘 본거지!"
나중에 이 일화에 대해 엄마와 대화를 잠깐 나눴는데 내가 만족한다고 하니 엄마도 딱히 할 말이 없으셨다고 한다. 그리고 다음 학기 중간고사 과학 과목에서 77점을 맞았다. 나는 그 시험지를 들고 이번엔 과학담당이신 내 담임 선생님께 종례 이후에 당당하게 보여드리며 "쌤! 쌤! 이거 봐요! 럭키세븐이 두 개!"를 외쳤다. 그때 선생님께선 어이없다는 듯이 허탈한 웃음만 보이셨고 난 그 반응이 썩 만족스러웠다. 중학교 1학년 동안 수학학원 1개만 다녔었고 그마저도 당시 야구에 푹 빠져있던 나는 자습시간에 학원 선생님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틈틈이 DMB (뭔지 기억나시는 분?)를 켜고 야구 중계를 보며 뺀질거렸던 기억이 아직 생생하다.
그랬던 내가 중2 때 역변을 시작한다.
중2 초반, 나는 여전히 공부에 큰 뜻 없는 철없는 학생이었다. 그렇게 여느 때와 똑같은 나날들을 보내던 중 엄마께서 국영수를 모두 가르치는 새로운 종합학원을 알아보셨다며 한번 다녀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물어보셨다. 나는 별 생각이 없었고 이미 내 친구 한 명이 그곳에 다니고 있었기에 다니겠다고 했다. 하지만 이 학원은 내가 다녔던 학원과는 차원이 달랐다. 체계적으로 수업을 진행하고 영단어 50개를 외우지 못하면 새벽 1시까지 학원에 붙잡아두는 건 물론이거니와 경시대회까지 별개로 준비시키는 상당히 무서운 학원이었다.
초반엔 엄마께 이건 사람이 할 짓이 아니라며 못하겠다고 하소연을 많이 했다. 하지만 조금만 더 버텨보자는 부모님의 설득과 내 뒤로 이 학원에 더 들어오기 시작한 친구들이 하나둘씩 늘면서 결국 발을 붙이게 되었다. 그리고 이 학원에서 지내는 기간이 늘면서 내게 당시에는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던 하지만 지금 되돌아보니 내 인생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 변화가 일어났다.
가장 먼저 학원에 다니는 것이 재밌어지기 시작한다. 종종 학원 측에서 서프라이즈로 이벤트를 열어주기도 했고 친한 학교 친구들 몇몇이 같이 다니고 있었기에 험난한 사교육 세상을 같이 헤쳐나가는 전우들의 느낌도 들었다. 또한 열심히 공부하는 주변 친구들을 보고 있자면 그동안 철없던 내 모습이 조금 부끄럽기도 했고 친구들이 존경스럽기도 했다. 그렇게 친구들을 보고 배우면서 오기 아닌 오기가 생기고 나도 할 수 있다는 마음가짐이 생기기도 했다. 그리고 사실 무엇보다 내가 짝사랑하던 여자아이도 같이 다니고 있었기에 이것 역시 큰 원동력이 되었다.
다음으로 선생님들이 너무 훌륭했다. 각기 다른 본인만의 스타일로 학생들을 지도했지만 모두 나와 잘 맞았고 쉬는 시간에 선생님들과 사담을 나누는 시간이 정말 재밌었다. 너무 권위적이지 않고 가끔은 인생상담, 연애상담도 해주시는 친근한 선생님 이미지셨다. 공교육 기관인 학교에서도 물론 좋은 선생님들을 찾아볼 수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때 당시에는 학교보단 사교육 시장에 나와있는 학원 선생님들이 더 훌륭하신 분들이 많다고 느꼈다. 학교 선생님들의 처우가 더 개선되고 사교육을 너무 요하지 않는 교육체계였다면 이 훌륭한 학원 선생님들이 학교에서 자신들의 기량을 뽐내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마지막으로 성적이 과목당 평균 10점 정도 올랐다. 중1땐 생각지도 못했던 100점이란 점수를 중3 때 한 번도 아닌 여러 번 달성해 보고 진정한 성취감을 처음으로 느껴본다. 스파르타식으로 학생들을 굴리니 성적이 안 느는 게 이상할 정도긴 했지만 훌륭한 선생님들의 지도도 있었고 초반에 때려치고 싶어 했던 내 모습이 무색하게 결국엔 성실히 학원생활을 잘 따라간 것도 있다.
공부라는 건 사실 별로 재미없다. 앞으로 평생 공부하며 일해야 하는 직업을 선택해 나아가기로 마음먹은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공부를 하는 이유, 즉 목표의식이 생긴다면 조금 얘기가 달라진다. 나는 병리학이란 직업을 중2 때 의학 다큐멘터리를 즐겨보면서 알게 됐다. 의학이라는 분야는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분야이고 그렇다면 마땅히 많은 양의 공부를 통해 엄청난 지식을 쌓아야 한다는 것은 비록 중2인 나이였어도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의학이라는 목표를 세운 후, 내가 공부를 대하는 태도 자체가 달라졌다. 그저 주변에서 하니까 따라 하는 것이 아닌 내가 이루고 싶은 목표의 가장 중요한 수단 및 길이라는 것을 깨달은 후, 공부는 재밌으면 물론 금상첨화겠지만 그렇지 못하더라도 미래를 위해 꼭 필요한 것이라는 믿음이 생긴다.
미국에 이민을 오게 된 것 역시 내 인생의 큰 전환점인 건 맞다. 하지만 미국에 와서도 나는 여전히 의학 쪽으로 진로를 정해 나아가고 있고 나의 이 꾸준한 발걸음의 원천은 중학교 때 환골탈태한 내 모습이기에 그때가 더 내 인생에 중대한 터닝포인트라 생각한다.
누구나 한 번쯤은 인생의 큰 사건을 경험한다 생각한다. 누군가에겐 "나 정말 사람 됐지" 하는 순간일 수도 있고 또 다른 누군가에겐 "그때 이후로 난 정반대의 삶을 살고 있어" 하는 일 일 수도 있다. 하지만 기쁜 기억이건 슬픈 기억이건 그 사건, 그 순간에 경험하고 깨달은 것들이 지금의 자신을 만들었다는 건 변함없는 사실일 것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분들은 각자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지금 살아가는데 원동력이 되는지 혹은 교훈이 됐는지 궁금하다. 혹시 본인도 잘 모르고 있다면 한 번쯤은 옛날의 자신과 지금의 자신이 어떤 계기로 인해 많이 바뀌었는지 생각해 보는 것도 꽤 재밌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