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방은 비었다. 어수선했다. 공기는 차가웠고 집기들은 널브러져있다. 빨간 소주에 더 빨간 라면을 먹던 테이블, 알 수 없는 이야기로 가득했던 화이트보드, 한 여름밤 잠안자고 지켰던 축제 집기들.
일부는 사라졌다. 형들만 앉을 수 있었던 구석 의자. 수 백번 침대가 됐던 검정 쇼파, 쉬는 시간 피시방을 자처했던 컴퓨터, 취해서 목을 부러뜨린 온풍기. 벚꽃엔딩이 처음으로 세상을 채웠을 때 기억이 담긴 물건들이다.
학과는 시대에 맞춰 다시 변한다. 연결의 시대다. 융합의 시대다. 효율과 적응, 생존을 명분으로 새 옷을 입는다. 변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해서 그랬을까. 나라가, 기업이 숱하게 휘청인다. 우리도 그렇다. 학과라고 별 수 있으랴. 시대의 역풍을 맞았다. 작년부터 천천히 체질개선에 나선 기억이다. 수백의 숨과 시간은 서서히 증발했다.
변화는 느렸지만 체감은 빨랐다. 친구들은 지상에 새 둥지를 틀었다. 둥지에 새 옷도 입혔다. 보라색이다. 색으로 시대를 규명하는 어느 기업이 말한 그 색깔이다. 2018년 새 시대의 색이다.
소설 <달과 6펜스>에서 찰스 스트릭랜드는 외딴섬 오두막집을 그림으로 채웠다. 오두막집은 그의 숨과 시간으로 가득했다. 그는 아내와 그림도구를 집에 담았다. 문둥병도 챙겼다. 마지막 인생을 그 집에서 보냈다. 걸작만 그 공간에 남기고는 떠났다. 아내는 집을 태웠다. 걸작도 집도 외딴섬엔 없다.
보라색 오두막집은 비울일 없길 바란다. 빨간 소주와 검정 쇼파도 그대로 남아있으면 좋겠다. 정모에 못가 친구 손 붙잡고 찾아야했던, 어리숙하게 선배 번호를 처음으로 물었던 5남 068이 그립다. 언제 학교로 돌아갈지 모르는 오지랖 암모나이트의 푸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