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광범 Sep 17. 2018

새벽 한 시, 기네스 한 잔

매일 새벽, 셔터를 내리면 완벽한 기네스 한 잔이 나를 기다린다.

I'M PRETTY MUCH FUCKED


그래, 아무래도 좆됐다.


아무래도 좆됐다. 어쩌다 이 땅, 아일랜드에 굴러 들어와 버렸다. 출국 전 모두들에게 현지 생활을 잘 버티리라 선언했지만, 허세 가득한 호기는 이미 사라진지 오래다. 난 더블린의 마크 와트니 이자, 척 놀랜드가 돼버렸다. 모두 수 백일을 화성과 무인도에서 버텼다. 마크는 식물학을 무기로, 척은 배구공 윌슨과 각각 화성과 무인도를 조금씩 정복해갔지만, 나에겐 집 앞 편의점도 버겁다. 매일 역경들이 나를 덮쳤고, 무한히 외롭고 허무한 시간들이 내 방에서 기다렸다. 총체적 난국. 그래, 아무래도 좆된거 같다.     


자, 상황을 정리하자.


더블린 셰익스피어 펍에 앉아 교통정리를 시작해 본다. 아일랜드와 대영제국 극작가의 기묘한 조합에 대해 고민해보고 싶은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그럴 여유가 없다. 둘의 상관관계보다는 지금 내 상황이 더 기묘하다. 실없이 내뱉은 말이 삶으로 되돌아온 상황이다.  

   

해외 생활은 강원도 군 생활 때부터 그려왔다. 막연한 상상이었다. 부대 특성상 외국생활을 한 친구들이 많아서였을까. 한국 땅을 떠난다는 씨앗이 소뇌 어딘가에 박혀 움틀 시기를 기다리고 있었나보다. 사실 이 생각은 환상에 가까웠다. “20년을 이 땅에서 지냈으면 다가올 20년은 밖에서 살아봐야지.” 철부지 발언이었다.   


가끔 멍 때리며 리피강을 바라본다

전역 후, 근 2년은 무중력 상태였다. 선택과 행동에 온전히 내 의지를 담지 않았다. 소우주에서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며 둥둥 떠다녔다. 지금 당시를 회상하면, 워킹홀리데이를 준비한다는 생각이 나를 밀친 기억이다. 그 힘에 저항하지 못하고 꽤 오래 여기저기 흘러들어갔다. 학교가 그랬고 대외활동, 아르바이트가 그랬다. 모두 감사한 경험들이었지만, 선택의 주인은 내가 아니었다.        


그렇게 정처 없이 떠돌다 결국 이 땅으로 흘러들어왔다. 말 그대로 흐름에 이끌려 흘러 들어왔다. 그 철부지 발언은 날 더블린에 떨어뜨렸다. 중력이 없어 발버둥도 못 쳤다. 어딘가에 닻이라도 내려놨으면 좋았으련만.       


유럽에서 사니 괜찮지 않나.


아니다. 꿈이나 환상이 직접 눈앞에 펼쳐졌을 때 오는 허무함이다. 새로 산 시그니처 스마트폰이 며칠 뒤 내 손에 쥐어진 깡통시계처럼 보일 때를 떠올리면 된다. 무엇이든 막상 삶으로 다가오면 익숙해져버린다. 꿈과 환상은 그 익숙함에 녹슨다. 찰리채플린의 말처럼 멀리서 봐야 희극이다. 다가가면 비극적인 삶이 등장한다.      


그래, 삶이다.


삶이 다가왔다. 외국인이 현지에 정착할 때 벌어지는 흔한 역경들이 나타났다. 주민등록부터 시작된 서류 작업들, 일과 집을 구해야하는 상황이 펼쳐졌다. 현지로 들고 온 자금은 하루가 지날수록 바닥났다. 돈과 자존감은 비례했다. 돈이 줄자 자존감이 바닥 쳤다. 오늘 쉬면 내일 굶어야했다. 엥겔지수는 높아져만 갔고, 이 상황을 막아줄 보험 따윈 없었다. 다큐멘터리 <식코>에 나온 누군가가 가진 돈으로 3번째 손가락과 4번째 손가락 중 어느 것을 수술 받을 지 고민하듯, 난 쌀을 살지 빵을 살지, 계란을 살지 골머리를 앓아야 했다.


몸도 마음도 가난해지는 나날이 지속됐다. 사람은 익숙함에 길들어져있더라. 익숙한 환경과 멀어지면 불안하다. 외로워 사랑을 하듯, 불안해 그리워한다. 불현 듯 몇 가지 떠올랐다. 을지로의 감자탕, 종로의 갈매기살, 용현동의 김치찜. 모두 소울푸드였다. 안정감을 주는 토템들이다. 먹거리가 생각나는 걸 보면 그간 살기위해 먹지 않고, 먹기 위해 살았나보다.      


완벽한 기네스 한 잔이 나를 기다린다.

지금 눈앞에는 셰익스피어의 기네스가 놓여있다. 칠흙 같이 어두운 맥주는 그 생김새처럼 고요하게 침묵한다. 가만히 바라보면, 해구 안으로 홀로 침전하는 기분이다. 그 깊은 바다 속 어딘가에 닻을 단단히 놓아둘 수 있을 것만 같다. 파도에 휩쓸려 어딘가로 부유하지 않도록 말이다.


그렇게 매일 새벽 한시, 기네스를 마신다.







작가의 이전글 어느 책에 대한 이야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