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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광범 Sep 25. 2018

잘 지내냐는 질문에는 어떻게.

한 걸음 떨어져서 냉철히 난도질할 시간.

늦잠을 자는 걸 보니 적응했나 보다.


눈을 뜨니 11시. 학원이 9시부터 시작이니 2시간 지각이다. 출석률 100%를 찍겠다는 목표는 어딘가로 증발했다. 해가 중천이 돼서야 부비적 일어나는 내 모습에 환멸을 느끼는 순간이 잦다. 머리와 몸을 바짝 잡아줬던 긴장감은 온데간데없다. 긴장이 사라지니 몇 달 전 본래 모습이 등장했다. 아, 역시 인간은 습관의 동물이더라. 물론 새 인간이 되겠다고 다짐하진 않았다. 원래 이런 놈이란 사실은 알았고 환경이 바뀐다고 획기적으로 변하지 않을 거란 사실도 인지하고 있었다. 그래도 마음 한편엔 환골탈태의 꿈이 숨어있었나 보다.


변을 하자면 일 때문이다.


구차하지만 정말이다. 주말과 주중을 분간할 세 없이 시간이 지나간다. 거의 매일 밤과 새벽을 펍에서 지낸다. 맥주 수 백 잔을 단 몇 시간 동안 팔아 해치우면 온 몸이 녹초가 된다. 폭풍처럼 아이리쉬들이 펍을 휩쓸고 간다. 태풍이 흔적을 남기듯, 그들은 빈 잔과 담배꽁초를 두고 떠난다. 모두 내 몫이다. 빡센 펍의 일상이다.

새벽 퇴근길 풍경이다.

그렇다고 워라벨이 망가지진 않았다. 일도 삶도 모두 펍에서 이뤄져서다. 쉬는 날에는 손님으로 펍에 들어선다. 이 때는 단골들과 수다를 떤다. 보통 이들과 기네스를 마시며 시시콜콜한 농담을 주고받거나, 담배를 태우며  짧은 영어로 한국 정치와 이곳 주택문제를 논한다. 한국말을 가르쳐 주면 아일랜드 은어를 얻어갈 때도 있다. 영어 이름을 쓰지 말라는 폴란드 작가나 트리니티 대학에 다니는 캠퍼스 커플과 연애관을 나눌 기회도 생긴다. 혹은 이렇게 혼자 노트북만 들고 브런치에 글을 쓴다.


문제는 일과 공부의 균형을 맞추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른바 워스벨(Working & Studying balance)이다. 아침에 느낀 환멸은 몇 시간 지나면 쉽게 잊힌다. 펍에서 몇 시간 전쟁을 치를 때는 셔터를 내린 뒤 마시는 기네스 한 잔만을 떠올린다. 그리고 문이 닫히면 기네스를 마신다. 흑맥주를 꿀떡 삼키며 환멸도 함께 소화시킨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면 속이 부룩한 이유다. 간혹 일하며 영어 공부한다는 비루한 변명이 소화제가 될 때가 있다. 살아있는 언어를 연마한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이 땅에 온 이유가 희미해졌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주객이 전도되는 중이다.


주객이 뒤바뀌는 상황에 고통받던 중, 컬쳐나잇이 찾아왔다. 한국으로 치면 문화가 있는 수요일이다. 단, 더블린에서는 1년에 1회 한정이다. 대부분의 박물관과 관광지를 무료로 입장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날이기도 하다. 머리도 식힐 겸 트리니티 도서관으로 발을 옮겼다. 버나드 쇼나 버지니아 울프도 이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그들의 숨결이 내 어깨를 토닥토닥 두들겨줄지 누가 알려나.


카톡이 왔다. 잘 지내냐?


19세기에 건축물에서 21세기 문명의 이기를 느끼며 카톡을 열었다. 아, 추석이었지. 친구의 추석 안부였다. 영상통화로 답장을 갈음했다. 65m나 되는 직사각형 도서관에 고서 20만 권이 비치된 모습을 스마트폰 카메라로 쭉 훑어줬다. 고즈넉한 도서관을 함께 느껴보라는 취지였다. 한국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광경이니까. 무엇보다 관광객 무리 모두가 그렇게 하고 있었다. 미묘한 소속감을 느끼며 현지 르포를 전했다.

 

롱룸(Long room)에 들어서면 모두 스마트폰을 든다

잘 지내네. 친구의 한마디. 해외에서 생활하는 모습이 보기 좋다며 나중에 귀국하면 보잔다. 그래 그러자며 대화 핑퐁을 주고받다 끊었다. 그런데 나 잘 지내고 있는 거 맞나?


글쎄.


분명 못 지낸다. 내가 안다. 일 문제야 얼추 해결됐지만, 아직 서류 작업이 남아 있다. 집 문제는 여전하다. 내 조건에 맞는 매물은 아직 등장하지 않았다. 발품 팔며 돌아다니거나 하염없이 기다려야 한다. 일은 고되다. 맥주 한잔 걸치고 새벽 퇴근길을 걸으면 현타가 올 지경이다. 여기에 환멸감까지 겹치면 자신을 부정하는 단계에 이른다. 간신히 세워놨던 자존감은 이내 무너진다. 확신할 수 있다. 난 잘 못 지낸다.  

가끔 우리는 6인치 프레임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 친구의 판단 기준이 됐을까. 프레임 속 세상일 거다. 6인치 스크린에 박제된 삶이다.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모습들. 모두가 힘들어도 풍요롭다. 마치 그래야만 할 것처럼 기쁘고 행복하다. 수많은 고난들을 접어두고 행복한 자신을 내비친다. 반대의 경우도 그렇다. 심연 속으로 빠져들 듯 외로워하고 하염없이 자신을 무너뜨린다. 그래도 꿋꿋하게 다시 일어선다. 없던 사실은 아니다. 모두가 그렇게 지내려 하고, 실제로 그렇게 지내고 있다. 이게 문제다.

영화 <매트릭스> 스틸컷

프랑스 철학가 장 보드리아르는 반 세기 전에 이 현상을 간파했다. 이른바 '시뮬라시옹'이다. 파생 실재가 실재가 돼가는 현상을 말한다. 풀어쓰면, 현실 같은 가짜 현실이 진짜 현실이 돼버리는 거다. 이 이론의 끝에 닿으면 우리는 '하이퍼 리얼리즘'의 세상에서 살고 있는 셈이다. 현실을 넘어서는 현실이며 진짜를 뛰어넘는 진짜다. 영화 <매트릭스>의 세계를 떠올려보자. 매트릭스의 세계는 가짜지만 현실 같아 보인다. 때로는 매트릭스가 진짜 세계처럼 보이기도 한다. 로봇 전쟁이 지속되는 잔혹한 세상이 진짜인지, 평범하며 평화로운 매트릭스가 진짜인지 분간이 안 간다. 우리는 어디에 살고 있는 걸까.


진단하자면, 원인은 실패에 인색한 우리의 경험에 있다. 실패가 두려운 거다. 대체로 투자 대비 효용가치를 중요시한다. 프레임 속 세상은 일명 공론화의 장이다. 자신의 투자 행위에 대한 결과를 공론화시키는 모양새다. 시간과 돈이 들어갔으니 행복해야 마땅하다. 수익률이 높은 애널리스트가 리포트에 숫자들을 새겨 공지하는 모습처럼 말이다. 일종의 행복 수익률을 공지하는 거다. 나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못 살아도 잘 사는 척, 고민되면 고통받는 척, 힘들어도 이겨내는 척, 기쁘면 행복한 척했다. 현재는 가짜 세계가 진짜 세계를 집어삼킬까 두렵다.

빨간약과 파란약, 두가지 선택지가 있다.

자, 약을 고를 시간이다.


어느 세계를 취할지 선택해야 할 순간이 다가왔다. 아침의 환멸에 얻어맞는 삶을 그대로 받아들일지, 백 년 전 건물들이 자아내는 유럽 풍경 속의 유학생이 될지는 내 손에 달렸다. 단, 중요한 사실은 한쪽 눈을 감아도 언젠가 다시 떠야 한다는 점이다. 못 보는 게 아니라 안 보는 거다. 세월아 네월아 평생 반쪽을 안 볼 순 없다. 부끄럽지 않을까. 아무리 한쪽을 가려도 나 자신이 안다.

스티브 잡스는 컴퓨터 속 기판도 디자인했다. 그 누구도 보지 않는 곳이다. 왜 메인보드 기판도 디자인해야 하냐는 질문에 그는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내가 알지 않나"라고 되받아 쳤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내가 안다. 나에게만큼은 솔직해져야 한다. 그렇다면,


그대, 거기 잘 지내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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