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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광범 Sep 16. 2019

국물사회

아버지는 국물 외골수다. 시쳇말로 국물성애자다. 국물 없이는 밥 한 톨 집지 않으신다. 상황이 여의치 않아 국물이 상에 올라올 수 없을 때는 사발에 물을 뜨셨다. 밥사발 오른편 국그릇이 나와야 식사를 시작하신다. 먼저 숟가락을 국에 적시고, 한 숟갈 마신다. 마른 목을 축이고 밥을 입에 넣어야 체하지 않는다나. 밥과 반찬을 번갈아 가면서 식사가 이어진다. 밥 공기가 절반쯤 줄면, 남은 밥을 국에 마신다. 밥 한 톨 한 톨이 국물을 머금도록 꾹꾹 누르신다. 국은 국밥이 된다. 당신은 그 국밥을 호로록 마시듯 잡수신다. 몇 밥알이 그릇에 남아 말라가면, 국물로 그 밥알을 적신다. 한 톨의 낙오자도 없다. 아버지의 밥상은 술적심(숟가락/술+적시다)으로 시작해 술적심으로 끝난다.    

  

한국인의 밥상은 국물문화권이다. 한식은 탕반(湯飯) 음식이다. 한식 밥상의 주인은 탕(국)과 반(밥)이다. 밥과 국이 밥상의 중심을 지킨다. 반찬은 거들뿐이다. 밥을 먹을 수 있도록 돕는 지원군이다. 이런 술적심이 없으면 부실하게 차린 밥상이다. 그렇다고 국물이 권위적이진 않다. 밥상에 위계는 없다. 국물은 귀하며 밥은 점잖고, 반찬은 천하고 졸렬한 존재가 아니다. 수평적인 위치에서 각자의 역할을 다한다. 골키퍼의 발에서 날아간 공이 수비와 미드필더를 거쳐 공격수의 슛으로 이어지듯, 국물과 밥, 반찬은 각자의 역할에 따라 한국인의 허기를 채운다. 하지만 밥상에서 국물의 부재는 반찬의 그것과 사뭇 다르다. 국물 없이 밥만 먹으면 목이 멘다. 슬픈 일,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입에 밥만 꾸역꾸역 넣는다” 말한다. 국물 없이 밥만 먹는다고 표현한다. 국물이 없는 밥은 먹기가 힘들다. 다시 술적심이 필요한 시점이다.      


소설가 김훈은 맛을 ‘화학적 실체’라기보다 ‘정서적 현상’이라 했다. 그는 된장찌개 국물을 이렇게 바라봤다.


“된장찌개 국물은 된장과 여러 건더기들의 삼투와 조합으로써 이뤄진다. 그 국물은 된장도 아니고, 개별적인 건더기도 아닌, 어떤 새로운 창조물이다. 거기에 깊이가 드리워진다.”  
<라면을 끓이며>, 김훈, 문학동네 p22


이 소설가는 그 깊이를 위안이라 칭했다. 미역국의 위안은 섬세하며, 된장찌개의 위안은 깊다했다. 사람이 국물을 머금으면 위로 받고 안심된다는 말이다. 국물을 먹고 난 뒤 “어~ 시원하다”라고 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참 희한한 현상이다. 뜨거운 국밥을 시원하다고 한다니. 실제 온도와 무관하게 뭔가 풀어주는 느낌. 무언가가 소화되고 해소된다는 의미다. 이것이 국물의 힘이다.      


국물의 힘은 조화에서 나온다. 조화는 한국인의 국물문화를 관통하는 코드다. 국물은 모든 것을 포용한다. 양념과 재료를 전부 품는다. 이들은 각자 다른 음색을 내며 냄비 속으로 스며든다. 국물은 이 모든 음색을 포섭한다.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며, 범선의 항해사다. 이윽고 새로운 창조물을 탄생시킨다. 음식계의 용광로(Melting pot)다. 그리고 국물은 조화다.      


이 조화는 한국인의 얼이다. 버릴 것을 버리지 않고, 한데 모아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다. 연대와 공동체를 탄생시키는 가능성이다. 이는 일본의 와(和) 문화와는 사뭇 다르다. 일본인의 조화가 상대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에 방점이 찍혀있다면, 한국인의 조화는 포용을 중시한다. 하긴, 일본에는 음식(飮食)이라는 말이 없다. 음식을 다베모노(食べ物)라고 하여 마시는 것이 제외돼있다. 한국의 음식은 마시고(飮) 씹어 먹는(食) 것이다. 우리는 마시고 먹는 것을 한데 묶어 생각했다.      


탕반(湯飯)은 혼합체계다. 국과 밥이 어우러진다. 국물은 액체며, 밥은 고체다. 이 이종배합을 서양인의 눈으로 바라보면 돌연변이에 가깝다. 문화론으로 발전시키자면,

“스파게티로 상징되는 서구문화는 (중략) 정식으로 국물음식을 만들 때를 제외하면 음식을 요리할 때 생가는 국물을 일종의 노이즈로 생각해 철저히 없애버린다.”   
<김치, 천년의 맛 – 상권>, 이어령 외, 디자인하우스, p25


노이즈는 불필요하고 부수적이다. 잉여생산물은 버려야 마땅하다는 게 서구 문화다. 순수함을 칭송하고, 노이즈를 제거한다. 나치의 제노사이드가 그랬다. 하지만 우리는 국물을 버리지 않는다.      


한국인은 노이즈를 수용한다. 고기를 삶은 물은 다시 국물을 내는 육수로 쓴다. 국물김치가 아니더라도, 김치나 깍두기에는 국물을 적적하게 담는다. 국물은 건더기를 적신다. 국물이 없으면 건더기는 죽는다. 한국인에게 이 노이즈는 그 근본이자 핵심이다. 국물을 반 이상 남기기도 하지만, 여전히 국물은 건더기와 탕의 맛을 정한다.      

국물을 먹을 때도 우리는 연대한다. 이른바 수저문화다. 국물을 떠먹을 때 숟가락을 국물 속으로 같이 넣는다. 소위, 정인지 침인지 모를 상황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상황을 더럽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국물을 같이 떠먹으며 유대감을 다지고 소속감을 유지한다. 국물은 관계다. ‘국물도 없다’는 관계의 단절이다. 상대에게 최소한의 호의도 없다는 말이다. 국물이 없는 한국인의 밥상은 허전함을 넘어 정이 없는 모습이다.      


한반도는 조각나있다. 일제는 친일과 반일로, 전쟁은 북과 남으로, 군부는 지역과 반 지역으로 한국인을 나눴다. 이는 다시 이념으로 갈라졌다. 아픈 역사다. 봉합을 하기 위한 시도는 여럿 있었다. 여러 운동과 항쟁이 이를 방증한다. 민족주의와 쇄국을 옹호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초연결시대에 외딴섬이 된다는 말은 적절치 못하며, 사실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연결은 이 시대의 운동이자 항쟁이다. 사람과 사람이 사람과 사회가, 사회와 세계가 연결되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기술은 사회와 세계를 통합시켰다. 연대감은 최고조에 이르러야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반대로 간다. 단체보다 개인이 우선시되며, 가상보다 실존을 부르짖는다. 1인가구는 늘며 대화는 줄어든다. 국물은 밥상에서 자취를 감춘다. 우리는 그 어느 세대보다 연결됐다. 방안에서 누구든지 만나며 소통할 수 있는 세상이다. 동시에 외롭다. 고립된다. 국물문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사람들과 한 숟갈 뜨며, 세상잡사를 밀어버리고 국물에 몸을 맡기는 풍경을 그린다. 아버지의 국물 사랑은 지금 이 순간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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