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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광범 Sep 21. 2019

우리는 오늘도 공장에 커피를 마시러 간다

상수역과 합정역 그 중간 즈음 단골 커피집이 하나 있다. 이 근방에서 약속이 잡히면 어김없이 발걸음을 그곳으로 내딛는다. 당인리 발전소에서 2분 정도 거리다. 복층 주택과 4층 빌라, 그 보다 높은 아파트 단지를 지나면 나오는 2층짜리 흰 건물이다. 벽은 세월의 풍파를 직통으로 맞은 듯 여기저기 칠을 탈피했다. 본연의 색을 잃은 채 적갈색으로 변해가는 철제 구조물도 간신히 걸려있다. 수북하게 쌓인 담쟁이넝쿨은 이 커피집이 얼마나 오래 자리했는지 말해준다. 주택가에 자리하기엔 어색한 건물. 카페 앤트러사이트다.      


카페는 신발 공장이었다. 수년 혹은 수십 년 동안 신발을 찍어내다 이내 멈췄다. 인부들과 기계가 뿜어내는 열기로 가득했던 공간은 오래 비었다. 코를 톡 쏘는 신나나 약품 냄새, 사람 땀 냄새도 났을 텐데 모두 증발했다. 커피 냄새는 빈 공간을 채웠다. 그 향은 사람들도 불러냈다. 컨베이어 벨트와 사람 키보다 큰 철문, 반쯤 무너진 벽과 원목 골격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천장도 변함없다. 하지만 이것들은 모두 과거의 본분은 잊은 지 오래다. 일부는 바 테이블이 됐고, 다른 것들은 책상이 됐다. 정년은퇴 후 재취업을 한 셈이다.     

 

공장형 카페나 창고형 매장은 앤트러사이트뿐이 아니다. 인천 가재울의 코스모 40, 강화도의 조양 방직, 성수동의 대림창고 모두 폐허를 재활용해 등장한 공간들이다. 이들 공간이 취하는 전략은 대체로 유사하다. 일부 구조물을 그대로 두고, 낡고 오래된 것을 드러낸다. 유행처럼 번진다. 이 모습은 낡은 것의 재탄생, 문화 재생, 재창조, 부활 등으로 불린다. 그리고 우리는 , 특히 2030 세대는, 이를 멋지다 생각한다. 힙(hip)하다 생각한다. 아름답다 생각한다.     


미적 감정은 관념이 물질적으로 표현됐을 때 나타난다. 마음속 생각이 어떠한 기호나 상징, 형상으로 집약돼 드러나야 우리는 감동한다. 형태 자체만으로 미적 감동을 느끼기엔 무언가 부족하다. 칼군무와 외모로 시장에 등장하는 아이돌 가수보다 이문세나 김건모, 밥 딜런(Bob Dylan), 스티비 원더(Stevie Wonder)의 노래가 상대적으로 더 오래 회자되는 모습을 보면 이해하기 쉽다. 이 미적 감성은 상상력을 자극한다. 폐허를 마주한 우리는 그곳을 상상으로 해부한다. 우리가 폐허에 한 발짝 더 다가서는 시발점이다.      


폐허 앞에 선 우리는 역사가가 된다. 대상의 근원이나 역사적인 발견, 수명, 변화를 가져온 사건과 활동을 나름대로 분석한다. 이 비공식 역사가들은 차가워진 폐허를, 상상력을 원동력으로 삼아 재가동시킨다. 공간의 어린 모습을 되짚어 보고, 빈 곳을 채운다. 미완의 공간에서 우리가 행하는 모습이다. 예컨대 이렇다. 빨간 벽돌이 하나하나 올라간다. 건물의 용골 역할을 하는 거대한 원목이나 철제 뼈대가 세워진다. 노트가 하나하나를 조여지고, 시멘트가 발린다. 설비가 건물 안으로 들것에 실려 온다. 수 천 번 오르내렸던 계단 틈이 조금씩 갈라진다. 천정 구석은 비가 새서 메워진다. 흠을 그대로 둔 채 공간은 고요해진다. 그 공간에 손때가 묻었고, 땀이 났다. 폐허는 때와 땀이 세웠다. 참 사람다운 건물이다. 인간적인 공간이다.     


실마리는 인간미다. 카페나 브루어리가 된 폐허는 어쩌면 우리보다 더 인간적일 수 있다. 이들 공간은 철저히 기능주의적이고 실존주의적이다. 기능은 바뀌지만 구조는 남는다. 과거의 기억에 얽매이지 않고 새로운 상황에 적응해 자신을 변화시킨다. 매몰비용에 연연하지 않고 신(新) 시장에 온 몸을 전적으로 맡긴다. 신발공장이 카페가 되고, 화학용품 창고가 복합 문화공간이 된다. 우리는 그들 공간이 이미 끝나버렸다 생각한다. 반면 공간, 그 자신들은 대하소설 중 한 챕터를 끝냈을 뿐이다. 언제나 미완이며 항상 과정 속에 있다. 본질이 정해져 있던 공간들은 그렇지 않은 우리보다 더 인간적인 거다. 폐허의 실존은 본질보다 앞섰다.     


오늘도 엔트러사이트에서 커피를 한 잔 마신다. 한 모금 마시며 신발공장의 용기를 생각한다. 과거의 영광을 내치기 어려웠을 거다. 다시 한 모금 마신다. 이번엔 카페가 된 신발공장을 쭉 둘러본다. 컨베이어 벨트와 거대한 철문, 무너진 벽과 속이 드러난 천장을 훑는다. 참 생경한 한 모금이다. 다시 한 모금 입에 털어 넣는다. 이 곳이 셈났다. 적어도 지금 나는, 어쩌면 우리는 폐허보다 덜 인간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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