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살아야 하니까.
통신사의 멤버십 포인트를 날리기 아까워 가장 많은 포인트를 소모할 수 있는 공짜 영화를 예매했다.
상영 시간이 괜찮았고,
독립영화로서 국제영화제에서 수상까지 한 영화라고 하길래, 가볍게 선택한 영화는 예상치 못하게 섬세하면서 적나라하게 내 모습을 비췄다.
아동기에 겪은 친족 성폭행의 피해자로서 고등학생이 된 ‘주인’이 ‘사람’으로서 ‘사랑’이 되고자 하는 이야기는,
비단 성폭행 피해자뿐만 아니라 나를 포함한 모든 형태의 피해자들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친족 성폭행의 피해자이지만,
또래의 남자친구와 연애를 하고,
친구에게 짓궂은 장난을 치고,
태권도를 배우며 하루하루 바쁘게 살아가는 ‘주인’은
키스를 넘는 스킨십을 시도하는 남자친구를 인정사정없이 밀치고,
‘너의 첫 경험은 어땠어?’라고 묻는 친구의 질문에 몸이 굳어버리고,
아동 성폭행과 관련된 영상에 입술을 앙다물고 부자연스레 시선을 회피하는 모습이 마치 ‘나’를 보는 것 같다.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직장에 다니고,
밤을 새워야 할 정도의 과도한 업무도 능숙하게 끝낼 정도로 숙련된 전문가로서의 나는,
침대 아래에 날카로운 칼과 야구방망이를 숨겨놓았고,
부모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면 능숙한 거짓말로 나의 치부를 덮으며,
아동학대, 가정폭력, 왕따와 관련된 영상을 마주할 때면 몸에 열이 오르고 숨이 가빠진다.
벌써 강산이 두 번 바뀔 정도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사실 지금 이 글을 쓰는 것도 너무 힘들다.
감정은 휘몰아치고 온갖 생각들이 정리되지 않은 채 머릿속을 헤집고 다녀서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모르겠다.
다만, 성폭행 피해자인 ‘주인’과 그녀의 멘토 ‘미도’를 통해서
나는 내가 지금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지, 내가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 알 것 같다.
‘주인’과 ‘미도’가 구체적으로 어떠한 성폭행을 당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저 등장인물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주인’은 삼촌에게, ‘미도’는 아빠에게 아주 어릴 때부터 오랜 기간에 걸쳐 성폭행을 당했었구나 짐작할 뿐이다.
가해자로부터 탈출한 이후에도 그녀들의 고통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과거의 불운이 남긴 상처들이 아니라, 새롭게 만난 사람들에 의해서.
그리고 내가 두려워하는 것이 거기에 있었다.
‘성폭행 피해자’로서 자신의 아빠를 벌하기 위해 증언대에 선 ‘미도’는
‘아빠로부터 성폭행을 당한 날임에도 불구하고 태권도 선수로서 우수한 성적을 거둔 이유’에 대해 질문을 받는다.
’성폭행 피해자‘로 고등학교에 다니는 ’주인‘의 행동들은
과거의 그 불운으로 인해서 어떠한 경향성을 갖게 된 것은 아닌지하는 평가의 대상이 된다.
동시에 그녀들이 정말로 성폭행을 당한 것인지 입증할 것을 요구받으면서.
성폭행 피해자라는 사실을 밝히기 전까지, ‘주인‘과 ‘미도’는
예쁘고, 싹싹하고, 활발하고 그리고 열심히 사는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고등학생’이고 ‘식당 주인’이었다.
그러나 ‘성폭행 피해자’라는 꼬리표가 붙는 순간, 모든 것이 바뀌었고 찬란한 미래를 꿈꾸는 그녀들은 ‘성폭행 피해자’라는 좁은 프레임에 갇혔다.
그녀들의 행동이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음에도.
내가 ‘가정폭력과 왕따’의 피해자라고 밝히지 못하는 이유는 나 역시 그 꼬리표에 갇혀 나의 모든 성취와 행동들이 재해석될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나에 대한 동정과 측은함도 분명 있겠지.
하지만 나의 불운한 과거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혼숙려캠프‘나 ’고딩엄빠‘를 즐겨보는 것처럼 심심풀이 가십으로 전락하고
‘본 데없이 커서 되바라졌다‘거나 ’왕따 당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며 나를 부당히 평가절하하는데 근거가 될 것이다.
그리고 불우한 환경에서 자란 여자들이 유달리 범죄의 표적이 되는 것처럼,
나 역시 내가 그토록 지키고자 노력해 왔던 나의 안전이 위협받을 확률이 크다.
그래서 나는 지금까지 내 모든 것을 쏟아부어 만들어낸 안전망에도 불구하고, ‘왕따와 가정폭력의 피해자’라는 프레임이 씌워지는 것이 정말로 두렵다.
‘주인’은 자신에게 억지로 덧씌워진 ‘성폭행 피해자’라는 프레임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악한다.
성폭행을 당한 과거에도 불구하고,
’내 인생 안 망했고, 내 영혼은 파괴되지 않았고, 나는 잘 살고 있어‘라며.
‘주인’은 또 다른 나다.
ABJ가 쇠파이프로 엄마를 두들겨 팼어도, ABJ에게 맞아 시퍼런 멍을 얼굴에 달고 절뚝거리며 수능시험장에 들어갔어도,
내 인생은 안 망했고, 나는 삐뚤어지지 않았다.
9년간 왕따를 당했어도,
지금의 내 곁에는 내가 어려울 때면 언제나 손 내밀어 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좋은 친구들이 있다.
나는 문제가 있는 사람으로 크지 않았다.
나는 지금 굉장히, 매우, 잘 살고 있다.
다만 ’주인‘과 내가 다른 점이 있다면, 그리고 내가 가장 바라고 부러웠던 것은 ‘엄마’라는 존재다.
영화를 보면서 가장 많이 울었던 장면은,
‘주인’이 어쩔 수 없이 성폭행 피해자임을 밝히는 장면도, 어린 동생이 누나를 보호하기 위해 성폭행 가해자의 편지를 숨기는 장면도 아닌
세차장에서 ‘주인’에게 건네는 엄마의 말 없는 위로였다.
모녀가 나란히 앉은 좁은 차 안에서,
시끄러운 세차 소리에 숨어 ‘주인’은 엄마에게 온갖 원망과 울분을 쏟아붓는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그 긴 시간 속에서 엄마는 묵묵히 옆을 지키고, 울음이 멈춘 딸에게 물을 건넸다.
그리고 조용히 물었다. ‘한번 더?’
‘주인’이 고개를 끄덕이자 엄마는 말없이 이미 지나 온 세차장 입구로 다시 유턴한다.
온전히 자신의 딸을 품어주는 엄마를 보면서 그런 엄마를 가진 ’주인‘이 부러웠다.
그 경험과 시간이 ’주인‘을 앞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원동력이었을 것이다.
나처럼 ‘분노’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자신이 온전히 받아들여진다는 느낌은 어떤 것일까.
가해자들의 진심 어린 사과보다,
그들에 대한 가혹한 복수보다,
내가 진짜 바라는 것은 소중한 사람에게 있는 그대로 나 자신이 받아들여지는 충만할 것이 분명한 그 순간인 것 같다.
언제 그 순간이 나에게 찾아올지 모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