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이야기(3)

편애

by 고장난시계

내 여동생이 딸아이를 임신하고 무사히 출산할 때까지의 과정을 지켜보면서, 나는 더욱 엄마가 이해되지 않았다.


내 여동생은 나이와 질병으로 인해 무려 1년 간 수차례의 시험관 시술 끝에 어렵게 어렵게 임신에 성공했다.

그러나 그 기쁜 성공 후에도 출산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은 뭐 하나 쉬운 것이 없었다.


내 여동생은,

여러 가지 문제로 인해 임신 초기부터 ‘화장실 갈 때 빼고는 침대에 누워만 있어라’라는 이야기를 들었고, 막달에는 뱃속 아이가 2kg에서 더 이상 자라지 않아서 마음을 졸였으며, 제왕절개를 하는 날에는 정말 목숨이 위태로울 가능성이 높았던 탓에 유언장을 써놓고 수술실에 들어갔다. 그리고 천신만고 끝에 - 이것은 거의 기적이나 다름없다 - 건강한 아이를 품에 안은 후에는, 주치의 선생님으로부터 ‘둘째는 정말 위험하니 시도조차 하지 말라‘고 엄중한 경고도 들었다.


그렇게 어렵게 얻은 귀하디 귀한 내 여동생의 딸이자 나의 조카는 매우 사랑스럽고 매우 예쁘다.

늙고 병약한 내가 팔과 어깨가 떨어져 나가는 줄도 모르고 하루 종일 안고 다닐 만큼, 내 가슴팍 가득 하얗게 분유를 토해 놓아도 오히려 내가 속이 불편한 그 아이에게 미안해할 만큼.


기억나지는 않지만 아마 나도 엄마의 피와 살을 깎아서 이 세상에 태어났을 것이다. 나뿐만 아니라 내 여동생도.

그러나 그렇게 힘들게 세상에 내보낸,

똑같이 자기 피를 이어받은 자식임에도 불구하고 그 자식들 사이에도 경중이 있다는 것은 엄마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


엄마는 말로는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이 없다, 나는 너희 삼 남매 똑같이 키웠다’라고 입버릇처럼 말했지만,
내가 지금까지 겪어온 바로는 자식들을 유별나게 차별하는 부모들의 무의식적인 자기변명에 불과하다.

자기 친자식도 차별하는 부모가 부지불식간에 양심에 찔려서 내뱉는 반어법적인 고백이랄까.


나와 6년 터울의 남동생은 그 탄생부터 우리 자매와 모든 것이 달랐다.


내 남동생에게는, 우리 자매에게는 없는 것들이 많았다.

우리 자매의 이름은 우리가 태어난 후 ABJ가 그냥 생각나는 대로 지었지만, 남동생의 이름은 무려 30년도 전에 거금 15만 원을 주고 유명 작명소에서 지어온 이름이었고,

우리 자매는 없는, 백일 사진과 돌사진과 돌반지를 가진 유일한 아이가 내 남동생이었다.

내 남동생은 또한,

우리 자매는 다닌 적 없던 유치원 - 그것도 세트로 지정된 유니폼을 입어야 하는 우리 동네에서 제일 비싼 사립유치원이었다 -과 보습학원 등 사교육의 혜택을 받았으며,

우리 자매에게는 상장을 한 개 타올 때마다 500원씩 올려주던 용돈이, 내 남동생에게는 아무런 조건 없이 그것도 꽤나 넉넉하게 주어졌다.

세금처럼 단 한 번 밀리는 일도 없이.


또한 우리 자매에게는 있지만, 남동생에게는 없는 것도 많았다.

리 자매는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잔심부름, 설거지, 라면과 같은 간단한 요리 등 집안일을 할 의무가 있었지만, 남동생은 ‘아직 아기’라는 이유 만으로 모두 면제가 되었고,

오로지 우리 자매의 힘으로 해내야만 했던 오만가지 숙제, 그중에서도 가장 오래 걸리고 어려웠던 만들기 숙제를 내 남동생은 제대로 해본 적이 없다. 이게 가능했던 이유는, 우리 자매가 대신해 주거나 엄마가 대신해 주거나 ABJ가 대신해 주는 등 다양한 대책이 있었고 방학숙제의 경우에는 우리 자매가 만들어두었던 것을 고이 모셔두었다가 이름만 바꾸어서 제출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 자매는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서 스스로의 힘으로 학교에서 좋은 성적을 받고, 입학원서를 넣을 대학을 결정했지만 - 막내가 고3이 될 때까지 엄마는 대학이 ‘가’군, ‘나’군, ‘다’군으로 구별되는 것도 몰랐으니 입시에 별 도움이 안 되긴 했다 - 내 남동생은 애초에 존재 자체만으로도 모두가 사랑해 줬기 때문에 좋은 성적을 위해 노력해야 할 이유도, 좋은 대학에 갈 필요도 없었다.


그래서 남동생이 고3 때 여동생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어릴 때는 누나들이 간 대학이 그렇게 대단해 보이지 않았는데 지금 내가 고3이 되니까 누나들이 대단해 보여.“라고.

그리고 덧붙였다고 한다.
‘작은 누나마저 만약 서울대에 합격했더라면 자기는 자살했을 거라고’


그 말을 듣고 여러 모로 짚이는 게 많았다. 떠오르는 기억도 많았고.

마흔이 되어서도 잊혀지지 않는 기억이.


학생이었던 나에게 유일하게 주어진 사교육은 EBS 교육방송이었기 때문에, 나는 그 방송을 보는데 필사적이었다.


지금은 세상이 좋아져서,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얼마든지 그 방송을 자유롭게 볼 수 있지만, 내가 고3일 때는 거의 불가능해서 그 방송이 방영되는 시간에 맞추어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당시 우리 집 거실에는 40인치 평면 텔레비전이, 안방에는 엄마가 시집올 때 혼수로 해온 13인치 뚱뚱이 텔레비전이 있었기에 나는 당연히 거실에 있는 텔레비전을 통해서 50분짜리 교육방송을 보려고 했다. 그러나 당시 중학생이었던 내 남동생은, 투니버스에서 방영하는 ‘괴짜가족’ - 아직도 기억이 난다. 그 흉측하고 별 내용 없던 만화 -을 봐야 한다며, 나에게 안방에 있는 텔레비전으로 교육방송을 보라고 우겼고 내가 물러서지 않자 엄마에게 빼액 소리를 질렀다.


당연히 고3인 나를 편들어 줄 거라고 생각했던 엄마는, 놀랍게도 거실에 있는 텔레비전은 가족 모두를 위한 것이니 교육방송 정도는 안방에 있는 텔레비전으로 보라고 했다.

내 남동생이 가족 모두를 대표하는 것인가에 의문이 들면서도, 나는 실랑이하느라 교육방송을 놓치느니 그냥 조용히 안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선택했다. 지지직 거리며 화면이 자주 멈추는 그 고물 텔레비전을 퍽퍽 치면서.


그리고 정확히 6년 후 내 남동생이 고3이 되고 내가 대학생이 되어 서울에서 지내다 오랜만에 집에 내려갔을 때, 나는 모처럼 보는 텔레비전이 반가워 거실에 있는 텔레비전으로 당시 유행하던 드라마를 보려고 했다. 그러자 남동생은 거실에 있는 텔레비전으로 교육방송을 봐야 하니 나보고 안방에 있는 텔레비전으로 드라마를 보라고 했다.


그때는 컴퓨터를 통해서 인터넷으로 언제든지 교육방송을 볼 수 있었기에, 나는 휴식을 방해하는 남동생이 괘씸해 물러서지 않았다. 내 고3 때의 기억을 잊지 않았기도 했고.


당연히 내 남동생은 정해진 것처럼 엄마에게 빼액 소리를 질렀고, 엄마는 나에게 했던 말은 기억도 안 나는지 ‘동생이 모처럼 공부한다고 하는데 방해하지 말고 안방 가서 봐. 안 그래도 한창 예민한 시기인데 누나가 되어서 그것도 양보 못해줘.’라고 얘기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 내 남동생은 자신이 우리 자매들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을 끊임없이 확인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봤을 때, 다른 사람들보다 뭐 하나 뛰어난 구석이 없던 내 남동생은

그동안 집안에서 끊임없이 들어왔던 그리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찬사를 통해서 형성한 자신의 독보적인 '우월함' 내지 '존귀함'이 학교나 사회에서는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실감하고, 그 괴리감을 떨쳐내기 위해 '공부를 열심히 한다'거나, '운동을 열심히 한다'는 등의 진지한 노력과 같은 어려운 길을 선택하기보다는 명문대생인 우리 자매를, 누구나 부러워하는 번듯한 직장에 다니는 우리 자매를 하녀처럼 부리는 것으로 상처받은 자존심을 회복하려 들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 데에는 엄마의 명백한 편애가 있음은 물론이다.


엄마는 격무로 하루에 잠을 3~4시간 잘 까말까 하는, 2주일에 겨우 하루를 쉬는 여동생을 닦달해 대형마트에서 잔뜩 장을 보아 남동생의 자취방 냉장고를 그득 채웠고,

이제 겨우 제 몫을 하는 사회초년생인 여동생의 월급을 쥐어짜서 집안의 생활비는 물론, 남동생의 자취방 월세를 포함한 자질구레한 생활비 - 더욱 황당한 것은, 공부를 오래 한 여동생보다 남동생이 더 일찍 직장생활을 시작했다는 점이다 -를 대개 했으며, 내 여동생에게 결혼을 생각하는 남자친구가 생기자 갑자기 남들 보기 부끄럽다며 - 집에 손님도 안 오는데 남들 보기가 부끄럽다니 어이가 없다 - 여동생의 돈으로 식탁과 에어컨과 소파와 세탁기와 냉장고를 가장 최신식으로 바꾸었다.


아마, 내가 일찌감치 절연을 선언하지 않았더라면, 나 역시 내 여동생과 같은 꼴이 되었으리라.


그리고 내 여동생이 시집가던 날, 엄마는 무엇을 해주었는가 하면 ‘아무것도 없다’.

여동생보다 일찍 결혼한 남동생에게는 몇 천만 원의 목돈을 쥐어주고, 그릇과 같은 세세한 살림살이며 텔레비전 등 비싼 가전도 챙겨주며 갖은 정성을 다했으면서도,

정작 집안의 기둥이었던 내 여동생에게는 아무것도 해주지 않았다.

누군가는 그래도 딸이 시집가는데 숟가락이라도 하나 해주지 않았냐고 의심할 수도 있겠지만, 놀랍게도 진짜 아무것도 해준 것이 없다.


내 여동생은 엄마에게 그리고 남동생에게 등골이 빨리면서도,

악착같이 모은 돈으로 - 여동생은 4명이 함께 쓰는 허름한 회사 기숙사에서 무려 6년을 살았다 - 예물을 마련하고, 결혼비용을 대는 등 자신이 모든 것을 해결했다. 그래도 엄마가 축의금은 탐내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내가 축의금을 정산해 보니 애초에 부모를 통해 들어온 축의금 자체가 없었다. 아니 도대체 사회생활을 어떻게 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계좌로 받고 입을 다문 것인지 모르겠지만 부모의 친구라던지 지인이라고 생각되는 이름으로 들어온 축의금이 보이지 않았다.

하긴 화환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으니.


그리고 일련의 참혹한 사건들로 인해 내 여동생도 부모와의 연을 끊은 지금, 엄마가 어쩐 일로 최근 조카의 100일 축하한다는 명목으로 제부를 통해서 단돈 50만 원을 보내왔다고 한다.


여동생이 목숨을 걸고 출산할 때에는 아무런 소식도 없던 사람이, 이제서야 꼴랑 50만 원을 보내왔다는 것이 기가 막힌다. 솔직히 또 뭘 얼마나 부려먹으려고 이런 알량한 돈을 보냈나 하는 생각부터 든다.

그래서 나는

‘50‘이라는 숫자가 주는 천박함에 질린 나머지, 여동생에게 다시 한번 ‘절연’을 다짐받았다.


엄마, 그냥 그렇게 좋아 죽고 못 사는 귀한 아들이랑 잘 살아. 그다지 좋아하지도 않는 우리 괴롭히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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