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질게 터졌다.
우리나라에서 정신과의 문턱은 매우 높다.
최근 들어 온갖 매스컴에서 ’마음의 감기‘라느니 ’현대인의 현대병‘이라느니 그 문턱을 낮추기 위해 애쓰고 있지만, 당장 인터넷 포털사이트에만 들어가도 ”정신과 진료기록이 OOO에 불리하게 작용되지 않을까요?“라고 묻는 질문이 수두룩 빽빽하다.
그리고 OOO 안에 들어갈 말들에는 단연코 취업, 결혼, 보험이 빠지지 않는다.
내가 몸담고 있는 직역에서 직간접으로 들은 흉흉한 괴담(?)들도 정신과의 문턱이 여전히 높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내가 치른 국가고시는 1차 객관식 필기시험, 2차 주관식 필기시험, 3차 인성 면접으로 이루어진다.
2차 시험까지 통과한 후 치러진 최종 면접에서 내 동기와 내 선배와 내 후배들은 국가정보기관에 의해 약 10년 치의 병원기록을 탈탈 털린 바 있다.
그 기록 안에는 시험을 앞두고 극도의 긴장감에 단 한 번 처방받은 수면제가 들어있었고, 연속된 시험 탈락 후 우울감에 단 한 번 받은 상담기록이 있었다. 당사자도 기억나지 않는 과거의 기록에도 불구하고 최종면접관들은 그 기록을 물고 늘어지면서 시험 응시자가 현재 제정신임을 증명할 것을 요구했다.
단 한 번 남긴 정신과 기록을 제외하고, 평생을 걸고 압박감으로 숨이 막힐 것 같은 시험을 치른 당사자가 제정신이라는 것은 당연하지 않을까?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었다면 1차 필기시험부터 최종 면접에 이르기까지 적어도 2년간 고강도의 집중력과 인내심을 요구하는 시험에 통과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단지 시험을 치르는 과정에서도 이러할 진데, 시험 합격 후 더 높은 직역에 도전하는 과정에서 정신과의 기록이 문제되지 않을 리가 없다.
2016년경 문제 되었던 소위 ‘사법파동’에서 사법부의 수뇌부가 자신들의 입맛에 맞지 않는 여러 법관들을 사찰한 기록들이 대거 문제 된 적이 있다.
당시 수뇌부는 특정 법관들을 블랙리스트로 분류해 이들에 대한 각종 비리사유는 물론 정치적 동향, 학술활동뿐만 아니라 재산관계, 건강상태 등에 대해서까지 대규모로 정보를 수집하고 이를 바탕으로 인사상의 불이익을 가한 정황이 드러났다.
가장 청렴하고 공정해야 할 사법부마저도 이러할 진데, 다른 조직들은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런 흉흉한 상황에서 정신과의 문턱을 넘는 것은 쉽지 않다. 내일이 없는 삶을 살지 않는 이상.
잃을 것이 많은 사람들이야말로 전과기록 다음으로 가장 남기지 않고 싶은 것이 정신과 기록일 것이다.
미래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서, 나 역시 정신과의 문턱은 결국 넘지 못했다.
수없이 고민하고 유명하다는 병원을 끊임없이 검색하고 핸드폰 자판에 상담 전화번호를 썼다가 지웠다가 수십 번 반복했지만 그래도 그래도 하며 그 문턱을 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도 가슴은 터질 것 같았고 시도 때도 없이 주룩주룩 흐르는 눈물이 머리를 날려버릴 것처럼 조여와 비겁하지만 병원기록이 남지 않는 심리상담센터의 문을 두드렸다.
거듭해서 심리상담센터의 기록은 정신과 기록과 달리 건강보험공단 기록에 남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고, 얼마든지 상담 기록을 남기지 않을 수 있다는 방법이 있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겨우 문턱을 넘었다.
사실 예약한 첫 상담 날이 다가오기 전까지 ‘이 정도면 괜찮은 것 같은데 굳이 갈 필요가 있을까’, ‘괜히 갔다가 나중에 문제 생기지 않을까’하는 생각으로 번민했음은 물론이다.
반쯤은 될 대로 되라는 마음으로 첫 상담에 들어갔을 때,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까라는 고민을 했던 것이 무색하게 말이 봇물처럼 쏟아졌다.
50분의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갈 만큼.
간단하게 할 얘기하고 적당한 조언을 찾아서 깔끔하게 단정하게 끝내려고 했는데, 두서없는 말 들은 입을 타고 뜨거운 눈물은 눈을 타고 밖으로 나왔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이야기들이 스스로 어지럽다고 느껴질 정도였고 난생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이런 흉측한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당혹스럽다고 느껴질 새도 없이 그냥 터져 나왔다.
누구에게도 할 수 없었던 이야기.
평생을 같이한 여동생에게도, 같이 고시공부를 하면서 서로 밑바닥까지 봤다고 생각한 20년 지기 친구에게도, 가장 믿고 의지한 사람에게도 하지 않았던 이야기들이 처음 만난 사람 앞에서 줄줄 쏟아졌다.
ABJ가 저질렀던 폭행, 추행, 엄마가 저지른 학대, 내가 저지른 패륜에 대한 기억들이 내가 가장 약해질 때마다 내가 인생에서 가장 힘겨울 때마다 발목을 잡는다고 호소했다.
같은 물컵을 보고도 누구는 물이 반 밖에 안 남았다고 하고, 누구는 물이 반이나 차 있다고 한다.
내 두서없는 말들을 잠자코 듣고 있던 상담사는 내게 말했다.
그 기억들이 발목을 잡는 것이 아니라, 아직 제대로 마음속에서 정리되지 않았기 때문에 제대로 정리하라고 신호를 주기 위해서 떠오른다는 것이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이번 상담을 통해서 그 기억들을 제대로 바라보고 제대로 갈무리했으면 좋겠다고.
그 기억들이 발목을 잡는 것이 아니라니.
그냥 잘 갈무리할 기회를 주기 위해서 떠오른 것이라니.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다.
그래서 그동안 내가 번번이 실패하면서도 자꾸 과거의 흉측한 덩어리들을 문자로 남기려고 했었나.
그리고 상담사는 또 덧붙였다.
흉측한 가족사가 내 약점이 될까 봐 얄팍한 거짓말로 덮는 내게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모든 가정에는 다른 사람은 알 수 없는 못생긴 부분이 있기 마련이라고.
가족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을 때는 그냥 사람 사는 게 다 똑같지 하면서 가볍게 넘기면 된다고 말이다.
어느 가정에나 숨기고 싶은 부분이 있다는 것이 안심이 된다.
물론 내 가족의 모습은 전 인류의 가족들의 모습들을 일렬로 세웠을 때 아랫부분에 놓여 있을 것은 틀림없지만, 그래도 다른 가정에도 숨기고 싶은 못생기고 흉측한 부분들이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안심이 된다.
내가 괴물이 아닌 것 같아서. 내가 비정상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 같아서.
상담을 끝내고 나오면서 어쩐지 후련한 마음으로 다음 상담을 예약했다.
눈물로 지친 머리는 띵하니 무거웠고 온몸은 전력일주라도 한 듯 여기저기가 쑤셨지만 그래도 요동치는 마음이 조금 잔잔해졌음이 느껴진다.
그동안 몇 번의 시도가 그러했듯 이번 시도도 실패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가능한 한 해 볼만큼 해보고 싶다. 그동안 혼자서 아등바등했던 문제들을 지금은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서 찬찬히 들여다보고 갈무리해보고자 한다.
일단은 최선을 다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