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병실 창문으로는 북한산이 보인다. 그 아래로는 이 지역구 국회의원 사무실이 보인다. 큰 현수막이 나부끼고 있다. 세월호 변호사로 유명한 그는 ‘거지 갑 의원’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그러고 보니 내일모레가 국회의원 선거일이다. 성인이 되어 선거권을 가진 이후 처음으로 나는 투표에 참여하지 못할 예정이다. 어차피 정치에 관심이 없는 이들에게 전화를 돌려 내가 이러이러한 이유로 병원에 있어 투표를 못하게 되었으니 정당투표는 내가 원하는 곳에 해주면 안 되겠냐고 부탁했다.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기꺼이 그렇게 해주겠노라 대답했다. 아무리 정치에 관심이 없는 이들이라 할지라도 고향 친구들에게는 이런 전화를 할 수가 없다. 내가 나고 자란 곳에서는 국회의원 선거 기간이 되어도 그 흔한 선거유세차량을 볼 수가 없다. 선거운동 차량이 내는 시끄러운 노래도 들을 수 없다. 그러한 풍경은 내가 서울에 살게 되면서부터 새롭게 보게 된 것들이다.
나의 고향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고서도 특정 정당의 공천을 받게 되면 자연스럽게 국회의원이 될 수 있었다. 나는 그런 사실이 너무 싫었다. 신학교에 다니면서 배웠던 사회교리와는 전혀 다른 정치적 행보를 보이는 이들이 당당히 국회의원이 되고 시장이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당선이 되면 주교님께 인사를 드리러 찾아왔고 지역 신문에는 그 모습이 큼지막하게 실렸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학교 2학년 때 기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와 정의구현 사제단 신부님들을 찾아뵈었던 적이 있다. 한 신부님께서는 나에게 아이고. OO에서 여기를 왔네. 기특한데 우리 신부 되고 만나자. 괜히 쫓겨나지 말고. 요새 서울 신학생들도 우리 잘 안 찾아와.라는 말씀을 하셨다. 그때 선물 받은 안중근 의사의 손도장이 찍혀있는 족자는 신학교 시절 내 방의 한 구석에서 나의 좌우명이 되어주었다.
“높은 뜻을 가진 선비와 어진 사람은
옳은 일을 위해 목숨을 버린다.”
고학년이 되고 방을 찾아오는 후배들에게 그 족자의 뜻을 설명해 줄 때면 나도 모르게 가슴이 뜨거워지곤 했다. 비록 신부가 되지는 못했지만 그때의 기억들이 지금의 내가 다른 사람들의 삶을 기록해 하나의 목소리로 만들어 세상에 내어 놓는 삶을 살게 된 출발점이 된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고등학생 시절, 나의 꿈은 기타리스트가 되는 것이었다. 기타를 딱히 잘 쳐서는 아니고 우연한 기회에 서 본 무대가 학창 시절의 나에게 너무도 짜릿했기 때문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기타리스트가 되는 것을 꿈꿨다.
하지만 나의 아버지에게 그 말을 할 수는 없었다. 공부를 꽤 잘했던 나에게 아버지는 법조인이 될 것을 권했다. 공무원으로 평생을 살면서 그는 고시, 특히 사법고시에 합격하는 것이 얼마나 멋진 삶을 보장하는 것인지를 틈날 때마다 나에게 말하곤 했다. 나는 어느 날 넌지시 내가 기타를 전공해 보는 것은 어떻겠냐고 물어보았지만 그는 딴따라 같은 시답잖은 소리 할 거면 학교를 때려치우라고 말했다.
그런 아버지에게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반항은 신학교에 가는 것이었다. 신부가 되는 것은 나의 어린 시절부터의 오랜 꿈이었다. 내가 어린 시절부터 존경하고 좋아했던 어른들은 대부분 신학생들이었거나 신부님들이었다. 그리고 신학생이 되면 집을 떠날 수 있다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물론 그 당시의 나는 굉장히 신앙심이 깊은 아이였기에 평생을 신에게 투신할 수 있는 삶을 살아보고 싶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나의 신학교 입학이 결정 되었던 날, 본당 신부님과 함께 저녁식사를 마치고 돌아온 아버지는 내가 평생 처음으로 보는, 술에 취해 흐트러진 모습이었다. 그리고 나에게 왜 그렇게 힘든 삶을 살려고 하냐고 계속해서 되뇌었다. 화장실에서 변기를 부여잡은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며 우습게도 나는 그가 나와의 이별을 아쉬워하는 것이 그리고 나의 삶에 대해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다는 사실이 기뻤다.
입학식 날의 신학교 풍경은 참으로 인상적이다. 신학교에 입학할 때는 자신이 입을 옷가지를 모두 챙기는 것뿐 아니라 이불 한 채, 성무일도서(매일 하는 기도서) 한 질 등 많은 것들을 챙겨 가게 되어 있다. 기쁜 날이기도 하지만 이제 영영 집을 떠나게 되는 것이라는 생각에 대부분의 어머니들은 미사를 마치고 아들들이 짐을 싣는 모습을 바라보며 웃으며 손을 흔들어 배웅하고 그들이 차를 타고 1학년들이 생활하는 기숙사로 떠난 후에도 한참 동안 그곳을 뜨지 못하고 눈물을 흘린다.
입학미사를 마치고 어머니의 가장 친한 친구분이 봉투 하나를 주셨다. 어머니와 그분이 내게 해주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는데 이야기를 꺼내기만 하면 눈물이 먼저 나서 써주는 것이니 지금 읽지 말고 기숙사에서 읽어 보라고 하셨다. 집을 떠난 첫 날밤에 나는 그 봉투를 읽었다. 자세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 글을 읽으며 한참 동안 눈물을 흘렸던 것 같다. 편지의 마지막에는 마키아벨리의 글을 살짝 변형한 듯한 글이 쓰여 있었던 기억이 난다.
두 눈은 언제나 하늘을 향하고
두 발은 굳건히 땅을 딛고 사는,
그런 사제가 되세요.
신학교를 다니면서 부끄럽게도 나는 어머니의 이 당부를 지키지 못했다. 나의 눈은 세상을 향했고 나의 두 발만 신학교에 붙여 두고 신을 쫓는 척했던 것 같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후회되는 순간들이 많다. 좀 더 열심히 수련해 좋은 사제가 되는 삶을 살았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가끔 하게 된다.
오랫동안 몸담았던 신학교를 떠나, 정처 없이 원 없이 6개월 여를 떠돌아다니다 집으로 돌아왔다. 일찌감치 대기업에 취직해 꽤 많은 돈을 저축해 두었던 형에게 큰돈을 얻었다. 늘 가보고 싶던 산티아고 길도 걷고, 책과 영화를 보며 어떤 곳일지를 머릿속으로만 그리던 파리와 리스본에서 머물기도 하면서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한 고민은 미뤄둔 채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나에게 주는 휴가를 보냈다.
여행에서 내가 얻게 된 교훈은 '어차피 한 번 사는 삶인데 하고 싶은 거 다 해보자. 늦었다고 생각하지 말고.'라는 것이었다. 여행을 다녀오면 열심히 준비해 로스쿨에 진학할 것이라고 생각하던 아버지에게 예술학교에 가서 공부하고 싶다는 말을 했다. 뭐. 또 안된다고 하면 집을 나가면 될 것이라 생각하니 오히려 마음이 편안했다.
아버지 저 예술학교에 가려고 합니다.
그는 대답 없이 어디론가 나갔다. 그리고 내가 신학교에 합격했던 날처럼 술에 취해 흐트러진 모습으로 돌아와 책 한 권을 건넸다.
갑자기 무슨 책이람. 나는 머리맡에 그 책을 던져두고 잠에 들었다. 그리고 그다음 날 그 책을 읽었다. 그 책에는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아들에게 남긴 유언, 가훈 등이 담겨 있었다.
아. 이런. 이건 반칙이 아닌가.
30년 가까운 세월을 무뚝뚝함과 괴팍한 성질로 나를 대한 아버지가 이 책 한 권으로 자신을 부정이 절절하지만 유교적 전통에서 아들에게 차가울 수밖에 없었던 사대부인 것처럼 스스로를 정체화 해 버리면 그를 미워해 온 나의 지난 세월은 어떻게 되는 건가.
나는 나의 할아버지가 떠올랐다. 나에게는 한 없이 따뜻했던. 떠올리면 언제나 까슬까슬하면서도 따스한 품 속이 생각나는. 그런 분이었던 할아버지가 단 한 번도 장남이었던 나의 아버지에게 따뜻한 말을 건네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그런 것이었을까.
책 한 권으로 지난 시간의 미움이 다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이 책을 읽는 순간만큼은 아버지를 이해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날 이후, 나는 아버지에게 조금씩 마음을 열 수 있었다.
왜 갑자기 아버지에 대한 생각이 났을까. 아마 국회의원 선거가 다가오고 있어서겠지. 아버지와 싸움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한동안은 전화를 말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