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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군 Sep 23. 2020

8mm 비디오테이프

        십 년은 더 된 이야기다. 어느 저녁, 아빠가 엄마에게 버럭 화를 냈다. 두 부부의 일상 다툼을 넘어서는 흥분이다. 처음에는 의아했지만, 일방적으로 엄마 탓을 하는 아빠에게, 엄마는 정말 속상하고 미안한 표정으로 대꾸하지 않는다. 엄마가 가만히 있다니.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구나, 아무튼 눈칫밥 20년이 넘는 나는 이 싸움에 끼어들면 안 되겠구나 하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싸움의 이유는 이랬다. 내가 스물몇 살이 되던 해일 텐데(이것도 적어 놨더라면 더 생생했을 텐데), 취업할 무렵이었다. 집을 이사했고, 이십 년이 넘도록 지고 살던 집 안의 낡은 물건들을 엄마가 웬일인지 내놨다. 내놨다기 보단 조금 솔직히 내다 버렸다고 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그중에 인켈社의 커다란 전축이 있었다. 한편에 LP판과 CD를 보관할 수 있는 공간이 있었는데, 하필 그 안에 아빠의 자랑이었던, 90년대 초반 어렵게 구한 일제 8mm 비디오카메라가 있었다. 그리고 우리 식구들을 몇 년 간 담아 둔 비디오테이프 박스가 있었던 것이다. 낡은 짐에 딸려 나간 비디오테이프들은 결국 찾지 못했다. 아빠는 틈이 날 때마다 그 작은 테이프들을 CD로 변환할 방법을 찾던 참이었다. 그러니 화가 안 났으면 그것도 아주 비정상이다. 더구나 엄마 편을 더 들어드리지 못해 죄송하지만, 비디오테이프도 비디오테이프인데, 사실 LP판이 한 뭉태기 있었다. 특히나 들국화의 LP앨범들이 잔뜩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또한 부러진 바늘만 고치면 바로 음악을 들을 수 있다고 자랑하던, 아빠의 축음기도 물론 함께 딸려 나갔다.

        

        그러고 보면 역설적이게도 엄마는 비싸더라도 좋은 것을 사서 오래 쓰자는 주의다. 때문에 옛날 물건과 짐을 쉽사리 처분하지 않는 사람이다. 하지만 하필 그 무렵은 나도, 동생도 곧 사회에 나올 준비를 하던 시절인지라, 이제는 집에 큰아들도 막내아들도 없을 터인데, 90년대 말부터 지리하게도 싸워 이겨 온 세월의 고단하고 낡은 흔적은 버리고 간단하게 살고 싶었을 엄마 마음도 짐작이 간다. 여하튼 엄마는 자책으로, 아빠는 분노로 한동안을 각자 속상해했다.

    

        내 입장에서도 안타깝긴 마찬가지다. 성인이 될 때까지 그 테이프들을 재생해 본 기억이 거의 없다. 학창 시절 학원 다니랴, 대입 준비에, 대학 가서는 논다고, 이제는 취업 준비에 바쁘기도 했거니와, 그때는 십몇 년 전의 추억이야 그렇게 소중하지 않아서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막 걸음마를 뗀 동생이 족발을 들고 아장아장 걸어 다닌다든지, 아빠 내가 한 번만 찍어 볼게 하며 조르던 내 모습, 고정해 둔 카메라에 몰래 다가와 카메라 위아래를 뒤집어놓고 유유히 사라진 동생의 흔적들- 한참을 뒤집어진 채로 녹화되었던 비디오, 어 이거 왜 이러지 하면서 카메라를 끄던 아빠의 모습과 음성- 정도가 기억이 난다. 그 비디오를 봤던 기억을 다시 겨우 기억해 내야 하는 서글픈 세월 3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 다시 본다면 눈물을 머금을 모습들이 많이 담겨 있었을 텐데. 젊었던 엄마 아빠의 모습, 음성 고스란히 보고 들을 수 있을 텐데, 참 아쉬운 일이다.

    

        그런데 결국은 말 그대로 시간이 약인지라 냉전은 곧 끝났다. 물론 두 분 모두 불현듯 떠오르는 생각들로 가끔씩은 각자 가슴 아파하실 수도 있겠지만, 결과적으로 비디오테이프를 잃어버린 것이지 추억을 잃어버린 것은 아니라는 나만의 결론이다. 다만 우리는 기억에서 기억으로 가지치기할 장면 장면들이라는 재료를 잃어버린 것뿐이고, 이 사건도 어느새 추억이 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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