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제인 Sep 12. 2020

우산 병원

이젠 아무도 고쳐서 쓰지 않는다


구두 때문에 늘 애먹는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내 발 때문이다. 오른쪽과 왼쪽 발이 미세하게 크기가 다르고 사이즈는 두 치수의 중간이다. 게다가 조금만 가죽이 딱딱한 구두를 신으면 발뒤꿈치가 헌다. 그러니 모처럼 신기 편한 구두를 만나면 횡재한 기분이다. 주야장천 그 구두만 신고 다닌다. 얼마 지나서 보면 구두는 뒷굽이 닳고 바닥도 나달 나달 하다. 편한 구두가 수명을 다할 때쯤이면 은근히 불안해져(설마, 구두 없어서 못 걸어 다닐까만) 그런 안성맞춤 구두가 있나 단골 가게를 기웃거린다. 그런데 어느 날 그 가게가 문을 닫았다. 한 시간 거리 동네로 옮겨간대서 전화번호까지 얻어놓았는데, 전화는 불통이었다.


구두든 옷이든 한 가게에 정착하면 다른 곳에서 잘 사지 않는다. 쇼핑을 그리 좋아하지 않아서다. 검소하다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다. 사고 흥정하고 고르고 하는 것이 서툴다. 주인이 권하면 거절을 못하고 사는 편이다. 그러니 사놓고 안 입는 옷도 많다. 차츰 단골 가게에 가서 사는 게 이득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정해놓은 가게만 간다. 그러던 단골 가게가 사라지니, 당황했다. 벌써 일 년 전 일이다. 그동안 다른 구두를 몇 켤레 샀는데 모두 불편했다.


어제는 혹시 그 구두를 인터넷에서 살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구두 아랫부분을 유심히 쳐다봤다. 'Vero Cuoio'라 쓰였기에 인터넷에서 찾아봤다. 나 같은 사람이 많은 모양인지, 줄줄이 이 글자를 묻고 있었다. 구두 가죽을 수입하는 회사 이름으로 영어로 ‘true leather',  진짜 가죽이라는 뜻이라 했다. 구두 메이커 이름이 아니었다. 구두 안쪽에 쓰인 게 브랜드 네임이라고 알려줘서 들여다보는데 도통 알아볼 수가 없었다. 핸드폰으로 찍어서 확대해 봤다. 그래도 읽을 수 없었다. 동대문 시장의 어느 구두 메이커로 짐작할 뿐이었다. 낡아도 소중한 것들이 있다.


전축의 턴테이블 바늘이 부러졌다. 손자 녀석 솜씨다. 어느 날 녀석이 궁금했던지 턴테이블 뚜껑을 열고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날로 턴테이블은 책장 위 높은 곳으로 올라갔다. 자주 듣지는 않지만 LP판이 있으니, 이따금 눈 오는 날이나 비 오는 날 한 번씩 날 것 같은 거친 음악을 듣는다. 찌지직거리고 바늘이 퉁 튀어 고개 돌려 바라보게 하는 음악을.

녀석이 갔으니 이제 텐 테이블은 안전하다. 다시 내려놓고 사용하고 싶다. 어젯저녁 나는 턴테이블 바늘을 사려고 온라인을 헤집고 다녔다. 2만 원 정도면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문득 고장 나서 리모컨으로만 작동되는 축의 스위치, 작동하지 않는 CD플레이어가 떠올랐다. 이게 바늘만 사서 될 일인가.

예전엔 동네마다 전파상이 있어서 선풍기나, 라디오 같은 온갖 것들을 뚝딱 고쳐줬다. 하지만 이제 그런 가게는 모두 사라지고 없다. 사람들은 조금만 고장 나도 버린다. 목 꺾여 버려진 선풍기를 분리수거장에서 여럿 봤다. 아예 이참에 전축을 새로 살까? 비싼 것 아니라도. 있던 게 사라지면 아쉽다. 나는 바늘을 찾다가 전축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대구 지하상가에는 우산 고치는 곳이 있다고 한다. 우산이 고장 나서 고칠 곳을 찾던 지인은 물어물어 지하상가 귀퉁이에 있는 작은 가게를 찾아갔다. 가게에는 간판이 걸려있었다. ‘우산 병원’ 손잡이가 고장 났다는 말에 노인은 손잡이를 쑥 뽑더니 다른 손잡이를 이것저것 찾아보곤 그 자리에서 새 손잡이를 꽂았다. 그리고는 아랫부분을 손으로 탁탁 쳤다. 그게 끝이었다. "다시 빠지지 않을까요?" 물으니, 노인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절대 그럴 일 없다며.


나는 우산 고치는 가격이 궁금했다. 요즘 싼 우산이 얼마나 많은데 돈을 주고 고치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사천 원, 이란 말에 나는 대뜸 그 돈이면 새 것 사겠는데요, 했다.

지인은 제 우산은 좀 비싼 겁니다, 했다. 우산이 싼 물건이었으면 노인은 가격을 더 싸게 불렀을까? 그렇진 않을 것 같다. 가게 세도 줘야 하고, 경제 논리에 맞지 않으면 가게는 버틸 수 없을 테니까.


이야기를 듣는 내내 나는 희미하게 옛 기억들이 떠올랐다.

집에서 고치지 못해서 애먹던 물건들을 의외로 쉽게 고쳐주던 사람들. 옆에서 지켜보면 고치는 과정 의외로 단순했다. 겉 면을 떼고 간단한 부속 하나 교체하던지, 자석 하나 바꾸면 전처럼 만사형통이 되었다. 우린 그들을 '손재주 좋은 사람'이라 불렀다. 그들은 다들 어디로 사라졌을까. 많은 가게들이 그렇게 사라졌다. 싼 물건이 쏟아져 나오니 기술을 가진 사람들이 설 자리가 없었다.


라떼는 말이야, 할 틈도 없이 세상은 달라졌다.




이젠 아무도 구두를, 전축을, 우산을 고쳐서  쓰지 않는다. 싸고 좋은 멋진 것들이 날마다 쏟아져 나오는데, 익숙한 옛 것을 잡고 놓지 않는 미련해 보인다. 그렇게 버려진 온갖 폐기물들은 태평양 한가운데에 모여 우리나라 크기의 16배 섬을 만들었다지 않은가. 이름을 뭐라 했는데….


낡은 구두도 이젠 버려야 한다. 속피를 갈면 신을 수 있겠지만, 이젠 아무도 그렇게 수선해주지 않는다.





작가의 이전글 톳밥과 찹쌀 옹심이 미역국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