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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인 Sep 13. 2020

파블로 카잘스, 새들의 노래

평화와 반전(反戰)의 메시지


친구가 바르셀로나 여행 이야기를 꺼냈을 때 나는 가우디의 성당을 떠올렸고, 남편은 FC바르셀로나 축구팀을 떠올렸다. 스페인 여행이라 하면 사람들은 무엇을 생각할까. 투우. 프레드 머큐리. 호안 미로. 살바도르 달리.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다 바라본 맞은편 건물에는 맨 위층부터 아래까지 커다란 노란 리본이 장식처럼 줄줄이 붙어 있었다. 우리에겐 익숙한 리본이다. 왜 이곳에 저 리본이 있을까, 의아해하니 옆에 있던 친구는 이젠 저 리본을 생각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이후 눈여겨보니 아파트 베란다에 노란 리본을 그린 플래카드를 걸어놓은 집들이 제법 많이 눈에 띄었다.


바르셀로나의 노란 리본은 이곳 카탈루냐 지방의 독립운동을 상징하는 것으로 전쟁의 참화로 돌아가신 분들을 추모하기 위함이라 했다. 오늘날까지 카탈루냐 사람들은 마드리드(까스띠야 지방)를 중심으로 하는 스페인과의 통합을 거부하고 있었다.


노란 리본의 역사는 어디에서 시작된 것일까?

그 기원을 혹자는 ‘익투스(예수 그리스도 하느님의 아들 구세주라는 뜻의 헬라어)’ 라 읽는 기독교의 물고기 상징으로 보기도 한다.

성경에는 유난히 물고기가 많이 나온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인 이야기, 물고기에 먹혀 사흘간 물고기 뱃속에서 지냈던 요나 이야기, 빈 그물에 낙심한 어부들에게 다시 그물을 던져보라 하신 예수님 이야기, 모나미 볼펜에 적힌 153이란 숫자는 이 그물에 걸린 물고기 수라 했던가. 물고기 그림은 기독교 신앙의 첫 상징이었기에 박해 시대 기독교인들은 흙바닥에 막대기로  물고기를 그려서 같은 신자임을 확인했다. 물고기 그림은 연대의 한 형태였다. 신앙의 연대, 지지의 연대, 슬픔의 연대.






바르셀로나는 스페인 동부 카탈루냐 지방에 속해 있다. 여행에서 돌아온 후 나는 그들의 역사와 인물에 관심이 쏠렸다. 파블로 카잘스(1876~1973)를 떼놓고 카탈루냐를 이야기할 수 없었기에『첼리스트 카잘스, 나의 기쁨과 슬픔』을 읽었다. 


카탈루냐에서 오르간 연주자의 아들로 태어난 파블로 카잘스는 스페인에서 파우(Pau)란 애칭으로 불린다. 파우는 카탈루냐어로 ‘평화’를 의미한다. 그는 본명인 ‘파블로 카잘스’보다 ‘파우 카잘스’로 불리는 걸 더 좋아했다. 열세 살 되던 해 카잘스는 고서점에서 비올라 다 감바를 위해 만들어진 바흐의 무반주 모음곡을 발견한다.

나는 악보 뭉치를 뒤져보기 시작했어요. 그러다가 오래돼 변색되고 구겨진 악보 다발이 눈에 띄었습니다. 그것은 바흐의 무반주 첼로를 위한 모음곡이었습니다. 첼로만을 위한 곡이라니! 나는 놀라서 그걸 바라보았습니다. 첼로 독주를 위한 여섯 개의 모음곡이라고! 나는 생각했습니다. 어떤 마술과 신비가 이 언어 속에 숨겨져 있을까? 그런 모음곡이 있다는 말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어요. 나는 곧 그 상점에 갔던 목적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어버렸습니다. 오로지 그 악보 한 뭉치만을 들여다보면서 조심스럽게 어루만지기만 할 뿐이었어요. 그 장면에 대한 기억은 지금도 전혀 흐려지지 않았어요. 지금도 그 악보의 표지를 보면 바다 냄새가 희미하게 나는 먼지투성이의 오래된 가게로 다시 돌아가 있는 듯이 느껴집니다. 나는 그 악보가 왕관의 보석이기나 한 것처럼 단단히 움켜쥐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방에 들어가서는 그것을 읽고 또 읽었어요.


바흐 시절에는 첼로란 악기가 없었다. 12년간 카잘스는 악보를 다듬고 연주해 첼로 연주곡으로 완성했다.  

-내가 예술가인 건 사실이지만 예술을 실현하는 과정을 보면 나 역시 하나의 육체 노동자입니다. 일생동안 그래 왔어요.


‘아라곤’이라고도 불렸던 카탈루냐는 그들만의 언어를 가지고 있는 독자적인 왕국이었다. 1939년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지원으로 스페인에 들어선 프랑코 정권은 카탈루냐의 자치권과 공용어의 지위를 박탈한다.

카잘스는 내전으로 폐허가 된 고향을 떠나 남프랑스 프라도에 정착했다. 이후 그는 정치적 중립을 명분으로 프랑코 정권을 인정한 이탈리아, 프랑스, 영국, 독일에서 일체의 연주 활동을 하지 않았다. '내가 고국에 돌아가지 못하는 이유' 라며 독일 공연과 베를린 필의 객원 연주도 거부했다. 그는 프라도에서 매년 카잘스 음악제만 열었다.

한 인터뷰에서 카잘스는 11세기에 카탈루냐는 이미 이 세상에서 전쟁을 없애기 위한 의회를 소집했다며 "높은 수준의 문명이 있었다는 증거로서 이보다 더 좋은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라고 말했다. 그는 고향에 대한 긍지로 가득 차 있었다.  


카잘스는 연주가 끝날 때마다 앙코르곡으로 ‘새들의 노래’를 연주했다. 카잘스의 연주로 유명해진 이 곡은 원래 카탈루냐의 민요이자 캐럴이었다. 온갖 새들이 예수의 탄생을 찬미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이 노래는 캐럴답지 않게 처연하고 슬프다. 카잘스에게 이 곡은 망명 후 30년 넘게 돌아가지 못한 조국을 그리는 사모곡이었다.

1971년 UN은 프랑코 정권에 대항해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한 공로로 카잘스에게 ‘유엔 평화상’을 수여했다. 유엔에서 한 연설 말미에 카잘스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수년간 대중 앞에서 첼로를 연주하지 않았지만, 다시 연주해야 할 때가 온 것 같군요. 이제 카탈루냐에 전해 내려오는 곡조인 ‘새들의 노래’를 연주해 드리겠습니다. 카탈루냐에서는 새들도 하늘을 날 때 '피스(Peace), 피스(Peace), 피스(Peace)'라고 노래합니다. 이는 바흐, 베토벤, 그리고 모든 위대한 음악가들이 찬미하고 사랑했던 선율입니다. 이 노래는 카탈루냐, 우리 민족의 영혼에서 태어났습니다.


‘새들의 노래’로 그는 전 세계에 평화와 반전의 메시지를 전했다. 그는 고집스레 음악으로 ‘평화’를 노래한 예술가였다. 카잘스는 97세로 사망할 때까지 조국의 땅을 밟지 못했고, 프랑코 사후 바르셀로나의 묘지에 안장되었다.




영화 ‘마지막 4중주’에서 마이스터 피터는 합주를 연습하던 학생들에게 카잘스 이야기를 들려준다.


-파블로 카잘스를 처음 만났을 때 나는 너무 긴장해서 연주를 엉망으로 했어. 그는 잘했다고 칭찬했는데, 나는 두 번째 곡도 망쳤지. 하지만 카잘스는 그때도 칭찬했어. 나는 그의 가식에 화가 났지. 후일 함께 연주할 기회가 있어서 그 이야기를 꺼냈더니 카잘스가 말하길 ‘뭐라고? 그때 자네는 활을 이렇게 추켜올려 이 곡을 이렇게 연주하지 않았나.’ 그리고는 오래전 내가 한 연주를 그대로 재연해 보였어. 그리고 말하더군. ‘난 그게 참신하고 특별해서 칭찬한 거라네. 내가 좋다고 한 건 전체 연주가 아니야. 난 어느 한 부분이라도 좋으면 그걸 칭찬하지.’


거친 연주로 합주를 망친 동료를 나무라던 학생들이 다음 연주를 시작한다. 연주는 나무랄 데 없이 훌륭해진다.  


파블로 카잘스 / 사진작가 유서프 카쉬(Yousuf Karsh, 1908~2002)



윈스턴 처칠의 카리스마 넘치는 사진으로 유명한 사진작가 유서프 카쉬가 프라도의 쿡사 수도원에 갔다.

파블로 카잘스, 노(老) 첼리스트의 사진을 찍기 위해서.


카잘스는 아무 연출도 없는 조용하고 어두운 방으로 카쉬를 안내해 등을 돌리고 의자에 앉았다. 카잘스가 바흐의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카쉬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마법 같은 분위기였다. 어느 순간 카쉬는 감옥 같은 방의 높은 곳에 난 작은 창으로 음악이 바깥으로, 세상으로 흘러나가는 걸 깨달았다. 이때까지, 이날 이후에도 카쉬는 피사체가 등 돌린 모습을 찍은 적이 한 번도 없다. 그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카메라의 셔터를 눌렀다.



#『첼리스트 카잘스, 나의 기쁨과 슬픔』 앨버트 칸 저 / 김병화 역 | 한길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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