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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인 Sep 18. 2020

단발머리

늙음에 순응해야 할까.


너의 단발머리가 보고 싶어.


요즘은 멋진 옷을 입은 여자보다 헤어스타일이 좋은 여자가 부럽다. 아무리 애를 써도 되지 않는 게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서다. 예식장에 갈 때 새 옷을 사는 것보다 미장원에서 머리 손질을 하는 게 더 싸게 먹히고 효과가 좋다는 것도 알게 됐다.


두 달 만에 만난 친구는 염색 안 한 하얀 머리를 뒤로 불끈 묶고 나타났다.

친구는 쑥스러운지 머리를 손으로 매만졌다.

 

-내 머리 어떠니? 요즘 미장원도 가기 싫어서 여름내 이러고 살았어. 머리 묶고 핀 꽂고 다니니 너무 편하고 좋아.

-괜찮아

-자연스럽고 편해 보여.

-젊어 보이는데?


다들 말했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언젠가 나를 위해 꽃다발을 전해주던 그 소녀
오늘따라 왜 이렇게 그 소녀가 보고 싶을까.



조용필의 '단발머리'소녀까지는 아니더라도, 난 갓 결혼해 사원 아파트 옆 동으로 이사 온 그녀의 이십 대를 기억하고 있다. 그때 그녀푸릇푸룻정도가 아니라 초롱초롱했다.


지난번 머리가 훨씬 좋아.

네 단발이 보고 싶어.


말하고 싶은데 다들 괜찮다 하니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내 말을 들으면 모처럼 외출한 친구는 마음이 상할 게 뻔하니까.


나이를 제일 속일 수 없는 게 머리인 것 같다. 열심히 운동해 삼십 대 같은 몸매를(뒤에서 보면) 가질 수 있고 쌍꺼풀을 만들어 처진 눈매를 끌어올리고 주름을 당겨 팽팽한 얼굴을 가질 수 있지만 푸석푸석하고 힘없는 머리카락만은 어떻게 안 된다. 머리는 나이를 감출 수 없다.


아침저녁으로 우수수 떨어지는 머리카락을 줍고 귀 옆으로 느는 흰머리를 바라보면 마음이 절로 스산해진다. 고개 숙여  한껏 눈 치떠서 거울을 들여다보면 정수리가 휑하다. 미장원에 가서 염색하고 손질해야 시기다.


나이 들면 머리에 돈이 많이 든다. 모처럼 절약할 겸, 미장원 가는  번거롭고 귀찮아서 집에서 염색하면 검은 물 튀어 욕실 청소해야지, 눈에 염색물 들어가지 여간 성가신 게 아니다. 그렇다고 완벽하고 깔끔하게 염색이 되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절충한 게 두 번은 집에서, 한 번은 미장원에서 염색한다. 일 년에 한두 번은 파마를 해야 하고, 긴 머리를 감당할 정도로 미인이 아닌 탓에 목덜미가 간지러울 정도로 머리가 길면 커트를 하니, 가계 지출에서 헤어 관리비의 비중이 날로 커진다. 하지만 평생 그래프가 우상향을 그리진 않을 테다. 어느 순간 지출도 꺾이게 되리라는 걸 다.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니 할 말이 많다. 나는 한 달만에 깨진 독서 모임 이야기도 털어놓고, 오지랖 넓게 최근 온라인에서 뚫은 추어탕 식당도 알려준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니.

-기가 막힌다.

속상해하는 친구들 덕분에 그야말로 막힌 게 뻥 뚫렸다.

마음 정리했다 생각했는데, 아직 앙금이 남아 있었나 보다.


-온라인으로 주문 못해. 아직은 보고 사야 마음이 편해.

망설이는 친구에겐 간단하게 문자로 추어탕을 주문하는 방법도 가르쳐 준다. 물론 친구는 주문 안 할 테지만.


친구는 외출을 못하고 집에만 있으니 위 무력증에 걸려 죽만 먹고 있다고 했다.


-속이 안 좋아. 입맛이 없어.

-굶음 되지.

나는 대수롭잖게 대답했다. 일부러 다이어트도 하는데 뭐 어떠니, 하는 생각이었다.


친구는 욱하는 표정을 지었다.

-한 열흘 굶어봐.


건너편에 앉은 친구가 한 수 더 거들었다.  


-그런데 살은 왜 안 빠지니?

-삼 킬로 빠졌어. 너희들 친구 맞니?


다들 비시시 웃었다.

우린 너무 서로를 잘 알았다.




다음 주엔 다른 모임 친구들이랑 산에 가기로 했다. 김밥이랑 커피를 들고.


코로나로 거리두기 지침이 고무줄처럼 조였다 풀어졌다 하니, 우리도 적응해 조금이라도 느슨할 때 만나기로 했다. 코로나 감염이 2년, 길게는 5년까지 간다는 속설이 있으니 계속 사람들을 만나지 않고 살 순 없었다. 어차피 추석 지나면 확진자 수가 늘 터이니 이 달에는 만나야 한다.


무릎이 불편한 친구도 있고, 손녀 돌보느라 시간 여유 없는 친구도 있어서 우린 오래 걷지 못한다. 조금 올라가 넓은 평상에 앉아 가을 산바람 쐬고 간단히 점심 먹고 수다만 떨고 오기로 했다.


문자 답 늦은 친구에게 전화로 이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말이 길어졌다.

오늘 만난 머리 묶고 나온 친구 이야기를 했더니, 손녀 돌보는 친구가 불쑥 말했다.


-나도 지금 머리가 그런데…. 


-넌, 꼭 미장원 가서 머리 예쁘게 다듬고 나와라.

-응응. 알았어.

 

전화기 너머에서 친구가 웃었다.


이러다간 폭삭 늙어서 만날지 모르겠어. 하나라도 젊을 때 얼굴 봐야 할 텐데. 이젠 늙음에 순응해야지. 자연스러운 일이잖아. 그래도.


우린 저녁 늦게까지 전화로 속닥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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